깊은 땅속에서 퍼올린 오래된 기억, 시인 허수경의 짧은 편지 긴 이야기
지구 반대편 낯선 유럽땅에서, 고고학이라는 역시 낯선 공부를 하고 있는 시인 허수경이 길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십 년, 세번째 시집이 나온 지도 어느새 이 년, 그간의 독일생활이 점점 궁금해지고 있는 이즈음, 그의 편지는 더욱 반갑습니다. 한 장 한 장 글을 넘기다보면 그 동안의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고 어느새 시인은 옆자리에 다가와 앉습니다.
멀리 있어서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그간의 자신을 이제 시인은 말합니다.
만일 내가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친구들에게 했을 것이다. 경숙에게 인숙 언니에게 조은에게 경미 언니에게, 이제하 선생님에게 김사인 선배에게 이시영 선생님에게 고향친구들에게 어머니에게 언니에게……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나날 동안, 그러니까, 내가 이름 없는 나날이라고 부르는 이 나날 동안 나는 혼자서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날 동안 외로운 저녁이면 함께 만나서 밥을 먹고 깔깔거리고 걱정 나누고, 했던 서울 사는 육 년 동안 만났던 그이들. 그이들이 있어서 좋았던 그 저녁을 위하여, 그 저녁을 위하여, 나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잔을 올려야 하리라.--본문에서
이 짧은 산문집은 그 이름 없는 나날의 기록입니다. 숨겨두었던 그 일기를 훔쳐보다보면, 가만가만, 조근조근 말하는 시인의 음성이 귓가를 간질이는 듯합니다. 변두리 조그만 찻집, 몸을 조금만 앞으로 숙여도 서로 코가 닿을 것 같은 그런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아, 소곤소곤 피곤하지 않은 수다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안에는 오래된 기억이 있고, 생활 속의 크고 작은 깨달음들이 있습니다. 벚꽃 날리는 들판, 양은주전자에 받아온 막걸리 향에 취한 대학 시절 시인의 모습이 보이고, 우울한 낯빛에 작은 키의 시인이 누군가에게 혀를 내밀며 메롱을 하는 모습이 겹쳐집니다. 다시 그 위에 어딘지 짐작도 안 되는 어느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먼지를 뒤집어쓴 채 땅을 파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잠깐은 킥킥거리고, 함께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 또 잠시 깊은 침묵을 나누고…… 그렇게 밤새 수다를 나누고 나면 가슴 한켠이 뻑뻑해옵니다. 킥킥, 히힛, 웃음 뒤엔 알 수 없는 물기가 만져집니다. 하지만 왠지 휴, 긴 한숨 뒤로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며 시인 역시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또 혼자 조용히 히죽거려도 보았을까요.
먼 곳에 있어서겠지요. 그런 시인의 글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일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한잔 하자며 탑골로 나오라던 선배의 말에 시인은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고 합니다. 선뜻 이곳으로 올 수 없는 곳에 그는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책을 덮은 오후,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는 버스 정거장에 서서 그를 불러내고 싶습니다. 불러내어 그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싶습니다. 잠시 투정을 부려보고 싶습니다. 김혜순 시인의 말처럼 그는 가만히 그런 우리를 품어줄 듯싶습니다.
허수경의 산문 문장은 이곳에서도 살 수 없고, 저곳에서도 살 수 없는 사람이 막막한 사막에서 오히려 집에 있는 사람에게 그 글씨들을 한 땀 한 땀 읽어주듯이 그렇게 박혀온다. 더 고독한 사람이 덜 고독한 사람을 품에 안아주듯이 말이다. 그의 문장은 고즈넉하고, 지는 햇빛이 마당을 휘돌아 서향으로 앉은 집 마루로 들 듯이 읽는 이의 혀를 감싸고 들어온다. 김혜순(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의 이 짧은 산문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머뭇거렸던 만큼, 책을 덮고 난 후에도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질 않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결국 시를 쓰기 위한 것이라고 했던 시인의 말처럼, 그가 먼 곳에서 "빛으로 불러"오고 있는 것은 그저 오래된 문자라 아니라, 그 자신의 시와, 그 자신의 말과 문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세상에 혼자뿐인 듯한 늦은 저녁, 천천히, 한 자 한 자, 시인의 편지를 펼쳐볼 것을 권합니다.
책을 덮고 나면 문득 그의 옛 다짐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미안하다, 나의 옛 시간이여.
나는 너를 이제 버린다.
나는 차갑게 세계를 건너갈 것이다.
* 초판 발행 | 2003년 2월 10일
* 153 * 210 | 값 8,000원 | ISBN 89-8281-628-3 03810
"나의 모든 발걸음은 시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허수경의 산문 문장은 이곳에서도 살 수 없고, 저곳에서도 살 수 없는 사람이 막막한 사막에서 오히려 집에 있는 사람에게 그 글씨들을 한 땀 한 땀 읽어주듯이 그렇게 박혀온다. 더 고독한 사람이 덜 고독한 사람을 품에 안아주듯이 말이다. 그의 문장은 고즈넉하고, 지는 햇빛이 마당을 휘돌아 서향으로 앉은 집 마루로 들 듯이 읽는 이의 혀를 감싸고 들어온다.--김혜순(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