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백지연 감각의 여행
작가의 말
작가의 말
"전부를 줄게. 전부를. 너도 나에게 전부를 다오."
요즘 내 몸에서 늘 그런 소리가 울린다. 창가에 서서 이르게 물든 아카시아 잎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숲을 바라볼 때도, 흐르는 계곡물에 시선을 떨구고 있을 때도, 달력을 넘길 때도, 전화벨이 울릴 때도, 시계를 볼 때도,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는 짧은 순간에도, 이제 막 꽃을 피운 화분을 볼 때도, 혼자 먹을 밥을 준비할 때도, 잠이 들어갈 때도……
전부는 소통의 욕망일까…… 이 세계와 나, 타자와 나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고독해지고 원천적으로 소통이 봉쇄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담담해진다. 전부를 줄게. 전부를…… 그건 내가 나를 향해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같다. 나는 나는 갈망한다.
언젠가 청소년을 상담하는 카운슬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청소년이 내상이든 외상이든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어떻게 충고하느냐고 물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애가 겪은 일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거라고 안심시키는 일이에요. 문제를 보편화시킨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건, 너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죠.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신을 짚고 일어서니까요. 그래서 전 나쁜 일도, 상처도, 원하지 않았던 일도 좋은 일과 마찬가지로 모두 지나가게 될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청소년기에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애들은 사실 몇 번이고 재생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 무척 동의했었다. 그러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라……
얼마 뒤에 나는 이 문장 하나를 표상으로 삼고 오래 전부터 써보고 싶었지만 눈길을 끌기 는 어려울 밋밋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끝을 고칠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대로 두었다.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간 고단한 성장에 그만한 값어치가 왜 없겠는가.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경험을 할 때는 셀룰로이드 종이에 든 조그마한 그것을 반드시 사용하라는 메시지라 해도 충분할 것 같다. 스무 살 시절의 그 어떤 무거운 주제의식 보다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심지어 운명에 간여할 수도 있으니까. 그 외에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왜 사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이미 내던져졌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묻기 전에 우리는 이미 변경할 수 없는 인과를 살고 있다. 그리고 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
달 없는 날 자정에 부엌칼을 물고 거울을 보면 훗날 만나게 될 운명적인 얼굴 하나를 보게 된다고 한다. 돌아보면 스무 살 때란, 달 없는 날의 자정이 아닐까. 부엌칼을 물고 거울을 보든 보지 않든 그것은 자유이다. 하지만 검은 유리창 같이 닫힌 그 나이에 열렬하게 존재를 밀어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운명적인 얼굴 하나를 언뜻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얼굴이다. 나는 스무 살에 지금의 나를 보았었다. 불행하면서도, 주변까지 불행하게 하면서도,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밖에 없는 고집은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불안하고 연약하다고 하고, 조금 아는 사람은 나를 강하고 용감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나를 어처구니없도록 연약하고 이해할 수 없도록 강하다고 한다. 모두 사실일 것이다.
오랫동안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했었다. 이젠 삶에 대해 좀 덤덤해지고 싶다. 새로운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것들…… 그것에 다정해지고 싶다. 민감하기보다는 사려 깊게, 특별한 것보다는 편안하게…… 그래서 내면의 미소를 잃지 않는 균형감각과 타자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는 해방된 힘을 갖고 싶다.
우기 내내 별 욕심 없이 소설의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글쓰기가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나를 지키느라 삶과 너무 다투면서 글을 써온 것 같다. 모두에게 미안한 일이다. 이젠 무엇보다 바로 이 삶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 나의 두 팔을 힘껏 뻗어.
2002년 가을 전경린
한없이 투명해서 위태로운 스무 살의 기록,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출간
『염소를 모는 여자』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등을 통해 가족의 문제, 여성적 삶의 정체성 문제를 특유의 감수성과 세밀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묘사해 주목받아온, 소설가 전경린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이 출간되었다.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라." 작가는 이 한 문장을 표상으로 삼고 "오래 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이 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는 여자아이의 스무 살. 무엇을 해도 심심하고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는, 다만 아주 막연히 어딘가로 가고 싶은 나이.
다 쓰고 보니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간 고단한 성장에 그만한 값어치가 왜 없겠는가.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 경험을 할 때는 셀룰로이드 종이에 든 조그마한 그것을 반드시 사용하라는 메시지라 해도 충분할 것 같다. 스무 살 시절의 그 어떤 무거운 주제의식보다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심지어 운명에 간여할 수도 있으니까. 그 외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왜 사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이미 내던져졌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묻기 전에 우리는 이미 변경할 수 없는 인과를 살고 있다. 그리고 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그려낸 스무 살의 우수련에게 스무 살은 꿈에 부푼 젊은 날이 아니라 처음으로 환멸과 방황을 맛본 시간이다. 스무 살은, 할머니가 병에 걸려 "손아귀엔 피딱지와 고름이 묻어 있고 톱밥가루같이 작은 구더기들이 꼬물거리며" 온몸을 기어다니며 악취를 풍겨대며, 소주에 취한 엄마는 "냄새나는 입을 대고 아무 비명을 질러대"고, 직장을 잃은 아버지는 늦은 밤까지 귀가하지 않고, 동생들을 피해 다락방에서 무의미한 단어를 나열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우수련이 참모 대신 음식 쟁반을 날라야 하는 일상에서 출발하고, 이 소설은 주인공이 그 일상에서 도망쳐 가출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 그 시간은 안정된 길로 접어드는 통과의례의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의 기나긴 삶에 처음으로 상처를 새겨넣게 되는 과정"으로 작용한다. 자기 손으로 목을 조이는 시간. 의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육체라도 버리고 싶은 시간.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낸 스무 살의 한 계절이며, 그 순결한 통증 때문에 차마 떠올리지 못하는 전설 같은 단어다.
세밀한 감각, 절실한 욕망, 생생한 통증.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라"
"그 일은 꽹과리 소리부터 시작된다." 스무 살 소녀 우수련은 자신 앞에 펼쳐질 생을 위해, 저마다 너무도 외롭고 고단하고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가족들과 결별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녀에게 죽음을 앞두고 썩어가는 할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은 견딜 수 없는 "무겁고 퀴퀴한 것"이기에 스스로 고아가 되기를 선택한다. 대학 내 문화운동 그룹에 참여하고 있는 수련의 친구 성재는 수련을 연극 연출가인 김해경에서 소개해준다. 삼십대의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체형이 바르고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몹시 검"은데다가 "섬세하고 유연한, 하얀 손"을 가진 남자. 수련은 김해경의 연극에 배우로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해경은 "고아" 수련의 방을 구해준다. 그러나 그 역시 돈 많은 사채업자인 장모와 전문대 교수인 탐욕스러운 아내와의 허위적인 가족관계에 속박되어 있는 처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자기만의 내밀한 방을 갈망하고 있다.
"난 해변가의 창녀촌에서 태어났어. (……) 엄만 내가 어렸을 땐 창녀였어. 내가 조금 자랐을 땐 포주 노릇도 했었지. 십대 초반부였는데, 그때까지도 엄마와 한 방을 썼어…… 그 시절 내 소원이 뭐였겠어?" "방."(56∼57쪽) 불완전한 가족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해경은 묘한 표정을 가진 수련에게 매혹되고, 수련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잠시나마 맛본다. 수련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성재에게서 성숙한 사랑을 찾지 못한 채 해경과의 충동적인 관계에 이끌려들어간다.
해경과 수련의 사이에 놓여 있는 감정은 운명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함께 연극을 준비하던 동료들의 치기 어린 계획에 의해 그들은 본격적으로 진전되지 못한 채 운명의 장난에 휩쓸려든다. 하룻밤을 지낸 이들의 모습을 해경의 부인이 목격하면서 이들은 각자의 가정으로 귀환한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수련의 가정 역시 평안을 찾고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새로 시작된 집에서도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수련은 평안한 가정에 안주하지 못한다. 이미 조용한 침묵에 숨겨진 분열을 보아버린 후이므로.
"집 알러지란 꽃가루 알러지나 카펫 먼지 알러지 같은 단순한 증상은 아닐 것이다. 가족과 역할을 분담하고 관계에 충실하면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지내는 일이, 다른 사람에겐 단지 일상일 뿐인 그 일이 어떤 사람에게 자기 용량을 초과하는 역기를 들고 무의미하게 버티듯, 과도하고 잔인한 노력이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188쪽)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각인시킨 상처와 아픔은 수련의 이후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임신한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진보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가 결국은 산으로 들어가 명상수련가가 된 해경과 여전히 가정에는 안주하지 못한 채 여행사 T. C. 일을 하며 살아가는 수련이 만난다. 수련은 "무척 힘들었지만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스무 살 이후 그와 보낸 밤은 생의 한가운데에 팬 빈 웅덩이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조심해서 지나지 않으면 자칫 빠지고 마는 허방,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의식의 폐실, 빈 괄호처럼 언젠가 채워넣어야 할 부채였으며,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할 의무로서 자리잡았다."(203쪽)
결국 "스무 살이 인생이 되게 하지는 말아라.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이야.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라는 해경의 충고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성장은 사회의 적응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상처받는 과정으로 고스란히 존재하고, 젊음은 꿈결같이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라 상처를 뒤집어볼까봐 두려운 시절이 된다. "고단한 여행이 시작된 그 순결한 지점을 더듬는 수련의 시간 여행은 스무 살의 시절이 겪는 내면의 방황을 힘겹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문학평론가 백지연)
불안과 균열, 몽상과 도주의 욕망
전경린의 소설 속에는 집과 가족에서 벗어나 먼길을 떠나는 여성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역시 삶의 모순과 환멸을 체험해가는 성장의 형식을 함유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성장의 여정이 일반적인 각성의 과정과 달리 주인공의 내면을 끊임없이 불안과 혼돈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길고 고된 여행 후에 주인공이 깨닫는 것은 안정된 삶의 진실이 아니라 위태로운 고립으로 향해 가는 자신의 운명이다. 주인공 우수련뿐만 아니라 오십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현실에서 사라져버린 친구 마리, 아이 하나만 데리고 통영 선착장에서 라면을 끓여 파는 성재,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택시에 올라타던 아버지의 모습은 일탈을 꿈꾸면서도 불안하고 허위적인 가족, 인간관계를 증명한다. 이들 삶은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이끄는 스무 살 여성의 꿈과 욕망의 가장자리에서 불안과 균열의 징후를 보여주는 세밀한 장치들이라 하겠다.
*2002년 10월 15일 발행
*ISBN 89-8281-571-6 03810
*4·6판 양장/224쪽/8,000원
*담당편집: 조연주, 장한맘(927-6790, 내선 213, 217)
한국문학은 이제 제대로 된 청춘의 비망록을 가지게 되었다. 스무 살. 그 순결한 통증이 잔잔한 노래처럼 복원되어 있는 이 소설은 무명으로 사라진 스무 살이란 나이를 불멸의 징표로 바꾸어놓았다. - - 서영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