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그리고 심연으로의 침몰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황홀한 비경
한때 세상을 사로잡았던 영화감독의 명성을 뒤로 하고 전락해가는 늙은 사내 쥐앙 모게. 그는 아자르 호에 자신의 모든 영욕을 싣고 대양을 떠돈다. 그의 은밀한 꿈은 아자르 호와 함께 조용히 사멸하는 것.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걷잡을 수 없는 생의 욕구로 탈주의 꿈에 들려 있는 소녀 나시마. 그녀는 아자르 호로 숨어들어가 새로운 시간의 세례를 꿈꾼다. 이글거리는 태양, 서걱이는 소금, 폭풍우, 절대적 침묵,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길 없는 항해가 이 둘의 만남에 새겨넣은 드라마는 원시적 생명의 바다에 대비되는 욕망의 심연을 그 무구한 혼돈과 혼란 속에서 격렬하고 아름답게 드러낸다. 남미 와우나나스 부족의 인디언 브라비토의 짧고 처절한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는 중편 「앙골리 말라」와 함께 클레지오의 대가적 면모를 한껏 확인시켜주는 『우연』의 세계는 삶의 본질적 순간을 향한 문학의 외경 그 자체이며, 마침내 심연 속 침몰을 통해서만 그 진정한 추구가 가능한 인간 내면의 황홀한 비경이다.
자연의 사랑과 생의 고통에 대한 동일한 체험을 이야기하는 「우연」과 「앙골리 말라」
원시적 바다를 배경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우연」은 소녀 나시마와 노년에 접어든 모게의 삶을 따라간다. 상실, 고독, 사랑의 아린 기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 유명 영화감독이었던 모게는 육신이자 영혼과도 같은 아자르 호와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와 딸마저 버렸다. 그에게 진정한 조국은 바다였으므로. 떠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 믿는 어린 나시마가 그 모험에 동참한다. 부드러운 살갗처럼 그들을 감싸안는 바다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모험과 우연이 기다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우연」은 짙은 고독과 매혹을 발하는 르 클레지오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아름답다. 기원전 5세기 인도 원시 부족의 젊은 남자가 겪은 처절한 삶을 인디언 브라비토의 비극적 삶으로 재현시킨 「앙골리 말라」 역시 아름다운 자연에 녹아든 잔잔한 슬픔을 전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목사에게 길러진 브라비토는 집을 떠나 자신의 부족이 사는 파나마 밀림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온 젊은 남자가 밀림에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약 밀수꾼들과 손을 잡고 악행도 서슴지 않지만, 다시 사랑하는 니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 브라비토. 하지만 돌아왔을 때 니나는 사라지고, 그녀의 부모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뒤였다. 브라비토는 복수한 뒤,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세속과 절연한 삶을 살지만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15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우연」과 「앙골리 말라」에 등장하는 순수한 영혼들의 삶에는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수련,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얻어내야 하는 본질적 가치, 문명사회의 허망함이라는 주제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악과 죽음이 거듭 등장하면서 훼손되고 더럽혀지는 순수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앙골리 말라」에 비해 「우연」은 보다 낙관적이다. “15년 전 나는 극도로 비관적인 소설을 썼다. 나는 인간에게서 가장 찬란하고 경이로운 것만을 간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나시마와 같은 존재들은 파괴되고 부패된 자신의 세상을 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젊은이들이 삶의 잔혹성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인터뷰 기사에서). 특히 『우연』에서는 자연의 리듬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긴장감이 극적 묘미를 배가시키는바, 대가의 면모를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한때 세상을 사로잡았던 영화감독의 명성을 뒤로 하고 전락해가는 늙은 사내 쥐앙 모게. 그는 아자르 호에 자신의 모든 영욕을 싣고 대양을 떠돈다. 그의 은밀한 꿈은 아자르 호와 함께 조용히 사멸하는 것.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걷잡을 수 없는 생의 욕구로 탈주의 꿈에 들려 있는 소녀 나시마. 그녀는 아자르 호로 숨어들어가 새로운 시간의 세례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