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여성 영미문학 연구자 로즈메리 잭슨의 {환상성 ― 전복의 문학 The Fantasy : The Literature of Subversion}(1981)이 서강여성문학연구회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환상문학에 대한 보기 드문 본격적인 연구서이다. 환상문학은 그간 여러 논자들에 의해 문학의 하위 장르로, 혹은 대중문학의 하나로 과소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문학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그것의 문학사적 가치는 물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탁월한 시각으로 분석한다.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적인 방식에 근거해 환상문학의 전복적 의미를 세목세목 밝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환상성에 관한 현대의 고전이라 불릴 만하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환상문학을 근대 자본주의의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세계 속에서 그 고유성을 찾는 하나의 영원한 형식으로 규정함으로써 환상성을 옹호한 바 있다. 프로이트 역시 ´기이함(the uncanny)의 문학´으로서 환상문학의 무의식적 욕망을 탁월하게 분석했다. 문학적 환상물은 현실 저 너머의 초월적 세계가 아니다. 더욱이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천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환상문학 역시 다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생산되고 사회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환상성은 사회적 맥락의 한계들에 대한 투쟁이며 사회의 억압된 욕망의 표현이자 현실에서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경계를 해체하는 사회적 위반이다. 로즈메리 잭슨은 그와 같은 환상문학의 특성을 ´전복´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베스트셀러 환상물 작가들인 루이스(C. S. Lewis), 톨킨(J. J. J. Tolkien), 르 귄(Ursula Le Guin)에서부터 포, 디킨즈, 도스트예프스키, 호프만 그리고 카프카와 토마스 핀천에 이르기까지 환상문학의 풍요로운 텍스트들을 탐사하면서 잭슨은 환상문학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빼어난 통찰을 펼친다.
환상의 정치학, 전복의 문학으로서의 환상성
이 책은 크게 두 분으로 나뉜다. 1부는 ´이론´ 편으로 환상물이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과 그 가능성을 살핀다. 여기서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환상문학론에 크게 힘입고 있는데, 토도로프의 유명한 저작 {환상성 ― 문학 장르에 대한 구조적 연구}에서의 환상문학론을 재검토한다. 잭슨에 따르면, 토도로프의 연구는 환상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즉 사실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 이전의 분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환상성의 시학을 체계적으로 공식화한 최초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토도로프의 연구는 환상성을 시학의 차원에 국한시켜 검토함으로써 한계가 있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을 미학의 차원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차원, 즉 환상의 ´정치학´으로 밝혀냄으로써 토도로프의 관점을 수정한다. 잭슨이 생각하는 진정한 환상문학이란 전복의 문학이다. 자본주의의 세속문화를 태생의 뿌리로 삼고 있는 환상문학은 본질적으로 지배 문화의 바깥쪽에 있는 현실 세계의 다른 축이다. 억압적이고 불충분한 경험 세계의 질서를 구조적으로,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해체시키고자 하는 무의식이 환상문학의 핵심이다. 2부 ´텍스트´ 편은 1부의 이론적인 논의를 토대로 환상문학 작품을 실제로 분석함으로써 환상문학의 스펙트럼을 제시하고 있다. 잭슨은 주로 19세기 유럽의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하되 최근의 소설들도 논의에 포함시킨다. 그녀는 환상문학을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나눈다. 19세기의 전형적인 환상담론인 ´고딕 이야기´들, 사실주의 소설 속에 고딕 시퀀스들을 삽입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있는 ´환상적 리얼리즘´(디킨즈, 도스토예프스키), 현실을 완전히 초월한 이차 세계를 다루는 ´빅토리아 시대의 환상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프카의 {변신}에서 토마스 핀천의 [엔트로피]에 이르는 ´최근의 환상물´. 잭슨은 이들 텍스트를 정신분석학적이면서도 사회 정치적인 방식으로 분석함으로써 동일한 기준으로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환상물의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인 함의를 밝혀내고 있다.
위반으로의 은밀한 초대
로즈메리 잭슨이 환상문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의 형식 미학이나 문학적 작동 방식 때문이 아니다. 토도로프를 넘어서 그녀는 환상문학이라는 문학적 형식 속에 내포된 사회 정치적 함의에 초점을 맞춘다. 환상성의 진정한 의미는 ´체제전복적 힘´이다. 다시 말해서 잭슨은 문학의 환상성 그 자체를 가치중립적인 문학적 구성 요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타개해나갈 수 있는 정치적 힘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현실 초월적인 이차 세계를 다루는 킹슬리(C. Kingsley)나 톨킨의 요정문학 혹은 루이스 캐롤의 환상적인 동화조차도 잭슨에게는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현실 정치적 텍스트로 해석된다. 환상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 세계나 현실적인 원칙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환상성은 단순히 초월적이고 신비한 세계에 대한 상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세계 속에서 드러나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충돌로 야기되는 기이함 혹은 "모순을 안고 그 모순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모순어법"인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환상성, 그것의 본질은 엘렌 식수스(H l ne Cixous)의 말처럼 "위반으로의 은밀한 초대"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잭슨이 제시하는 ´점근축(paraxis)´이라는 용어이다. 광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기술적인 용어는 카메라 렌즈와 대상 사이의 텅 빈 공간을 의미한다. 잭슨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 그러나 실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실재 그 자체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그 영역을 환상문학의 지형으로 설정한다. 실재적이면서 비실재적인 환상 영역을 표상하는 이 비유적 공간을 통해 잭슨은 환상성의 본질을 밝힌다. 환상성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떠도는 유령과도 같다. 환상의 영역은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실 이면에 감춰진 틈새 공간이다. 그리고 이 틈새 공간은 현실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존재들이 현실 질서를 위반하면서 출몰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틈새 공간에서 안전한 일상의 배후가 폭로된다. 익숙한 세계를 낯설고 변형된 세계로 바꾸는 전복의 시학이 펼쳐진다. 억압된 욕망들이 표면으로 떠올라 지배 문화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환상문학은 현실 사회질서가 의존하고 있는 단일한 의미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문화적 안정성의 뿌리를 흔들어놓는 기능을 한다.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
영국 워윅 대학교에서 영미·유럽문학을 전공하고 요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 웨스트 잉글랜드 대학교, 베를린 자유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해왔다. 그밖에도 영국 국내외 여러 칼리지와 예술 개방대학 등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워크샵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영미권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번역 소개되고 있는 그녀의 저서로는 환상문학으로부터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복적 타자성을 읽어낸 명저 『환상성 - - 전복의 문학Fantasy: The Literature of Subversion』(1981) 외에 『붓다의 눈The Eye of the Buddha』(1991), 『떠나가는 어머니들Mothers Who Leave』(1994) 등이 있다.
서강여성연구회
1995년 발족한 서강여성문학연구회는 특정 주제를 선정, 2년간 공동 연구한 결과를 논문집으로 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논문집으로는 『한국여성문학연구』(1996), 『한국문학과 모성성』(1998), 『한국문학과 환상성』(2001) 등이 있다. 공임순(서강대 강사), 김양선(한림대 강의교수), 류정월(서강대 강사), 박숙자(서강대 강사), 박정수(서강대 강사), 서지영(정신문화연구원 박사과정), 심진경(서강대 강사), 윤경희(서강대 강사), 이부순(서강대 임시 전임강사), 임수현(서강대 강사), 최주한(서강대 강사)
담당편집 : 김현정, 조연주(927-6790, 내선 217, 213)
영국의 여성 영미문학 연구자 로즈메리 잭슨이 쓴 환상문학에 대한 보기 드문 본격적인 연구서.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문학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그것의 문학사적 가치는 물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탁월한 시각으로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