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설계에서 만나기 힘든 집요한 관념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한국 문단의 개성적인 신인으로 주목받아온 정영문의 세번째 소설집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일관되게 추구해온 권태로움과 죽음의 문제를 좀더 심층적으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이 점과 관련하여 그의 소설 쓰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그의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은 병이나 자해로 인해 죽어가고 있거나, 죽을 지경으로 노쇠해 있거나, 심지어 죽어 있는 채로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는 채로, 죽음을 앞당겨 누린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유지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죽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니 그들에게 죽음은, 혹은 죽음과 유사한 상태를 차라리 축복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리비도를 방출함으로써 겨우겨우 열반 상태를 유지하고, 바로 그렇게 뱉어낸 말이 정영문의 소설을 이룬다. 그 말이 작가의 손을 거쳐 문장을 이룬 후, 일군의 텍스트들로 모일 때, 그토록 어둡고, 지루하며, 무의미하고,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이야기 사슬, 즉 소설이 탄생한다."
현대인의 삶과 그 존재를 권태로움과 그 끝에 직면한 죽음으로 해석하는 정영문의 소설쓰기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과 블랙 유머를 통해, 한없이 권태롭고 무의지한 생애들을 의미 있게 발굴해냄으로써 역설의 쾌감을 느끼게 한다. 소설가 전경린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정영문을 통해 권태와의 긴장을 완화하고 생의 제도권 안으로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조금 기운을 빼야 할지도 모른다".
운동의 최소화, (1-1)+(1-1)+(1-1)……=0
정영문 소설의 특징 중 한 가지로 가급적 움직이지 않기, 즉 운동의 최소화를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아무런 동요도 긴장도, 불안정한 에너지의 변동도 없는 열반 상태(바바라 로우 열반 원칙)로의 실현, 뱉은 말을 지움으로써 의미의 최소화하기 등도 정영문 소설을 독특하게 하는 요소다. 이번 창작집의 주인공들도 예외는 아니다.
[끝]은 오랜 전에 감옥을 다녀온 일이 있는 나와 자궁암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그리고 있다. 그녀의 죽음 뒤 염화칼륨 앰풀을 이용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나가 스스로 "지금 나의 모든 기억이 사실일까"라고 의심할 정도로 무의미한 어조로, "결코 사랑에 이르지 못한, 처음부터 사랑에 이를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었던" 두 늙은 남녀의 무의미한 만남에 대해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휠체어에 앉아서 무의미한 유언을 반복하고 있는 노인의 독백인 [무게 없는 부피]는 정영문 소설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캠코더를 이용해 자신의 유언을 녹화한다.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입은 먹는 입, 키스를 하는 입이 아니라 오로지 말하는 입이다. 게다가 그 입이 뱉는 말들은 모두 부조리하며, 급기야 그 부조리한 말마저 녹화가 종료되는 순간 그 입의 주인에 의해 다시 지워진다. 이런 모습은 고문실에 줄곧 마주 보고 앉아서 아무 사실도 밝혀내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대화만 계속하는 [고문하는 고문당하는 자], 창 밖에 비가 오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는 채 비스듬히 누워 전화기를 하염없이 붙잡고 있는 두 남녀의 대화로 이루어진 [불면증] 등에서도 나타난다. 김형중씨는 이 말이라는 행위에 면죄부이자 행위를 지우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정영문의 주인공들은 최소한의 리비도를 방출함으로써 겨우겨우 의사 열반 상태를 유지한다. 항상성의 원칙이 지켜지기 위해 필수적인 리비도 양의 조절을 위해서는 어떤 배출 행위가 필요한데, 그것이 정영문의 주인공들에겐 무의미한 중얼거림으로서의 말이다. 말로 인해 행위는 유보되며, 사지는 행위를 멈추게 된다. 오로지 입만이 살아 사지가 죽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지가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육체가 이동해야 하며, 당연히 타인과의 접촉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관계가 형성되며, 최종적으로는 접촉한 대상에 대한 애정이나 증오, 원한과 질시가 생겨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비도의 어쩔 수 없는 집중으로 이어진다."
이런 불행한 사태에 반해서 그들을 의사 열반 상태에 묶어두는 임무를 말이 수행하는 것이다.
[배회] [후각 상실]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의 화자들은 "당연히 유폐되어 있어야 할 죽음이 청결과 위생으로 숨이 막힐 지경인 산 자들의 세계로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나선다". 한겨울 거리를 배회하는 나는 경찰서에서, 후각을 상실한 나는 옛 동네에서, 문득 모든 게 "간신히" "멀게" "까마득하게" "아주 오랜 전의 어느 날처럼" 느껴지는 나는 연인과의 산책에서 예기치 않은 충돌을 겪는다. 저자는 우리들 자신의 일상과 유사한 이들의 일과를 보여줌으로써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권태로운 것인지 드러내고 있다.
그 밖에 [자폐증]과 [보이지 않는 균열]은 수용소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무감하게, 겨우겨우, 산 채로 열반을 누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정영문 소설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의미한 문장들의 나열은 결국 소설 전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끝없는 동어반복, 그저 시간을 지우고 의미를 지우는 순환적인 이야기 사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덕분에 그의 화자들은 의사 열반 상태를 가까스로 유지한다." 여기서 (1-1)+(1-1)+(1-1)……=0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하여
권태는 생의 불치적 실존조건이며, 우리들 영혼의 진흙수렁이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우리들 생애만큼이나 커다란 식욕을 가진 이 권태라는 적에 대해 그 동안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권태의 몽타주를 그려낸, 권태에 관한 지난한 탐색의 기록이다. 그런데 정영문은 권태에 대한 긴장을 해제하고 권태에 존재론적 독자성과 발랄한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권태에 부역하며, 한없이 권태롭고 무의지한 생애들을 의미 있게 발굴해낸다. 심지어는 그에게서는 권태를 제조하고 유포하고 유희하는 불온성까지 느껴지는데, 대단히 질긴 신경을 가진 지력이다. 우리는 이제 정영문을 통해 권태와의 긴장을 완화하고 생의 제도권 안으로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조금 기운을 빼야 할지도 모른다. -전경린(소설가)
마치 무게 없이 부피만 있는 풍선처럼, 핵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영문의 소설들은 역설적으로, 끝내 드러나지 않는 어둠과도 같은 삶의 단면을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불면증과 자폐증과 분열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병을 처절하게 앓고 있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과 더불어 그로테스크한 언어의 산책을 끝내고 나면, 그 비현실적인 꿈속 같은 풍경 속에서 언뜻 우리의 상실된 감각을 되찾은 것만 같은 환각에 접하게 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되찾은 감각 속에서 우리는, 고문당하는 자가 다하는 고문의 언어, 그 표면적인 가혹함 속에 감추어진 연약함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자폐의 언어,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역설, 그리고 아무런 형태도 빚어내지 못하는 불면의 언어, 그 분열된 채 어긋나기만 하는 대화가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피로한 의식을 위로해줄 수도 있다는 반어적인 진실을 이해하게 되기에 이른다. -손정수(문학평론가)
*신국판/312쪽/값8,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정영문 소설의 주인공들은 최소한의 리비도를 방출함으로써 겨우겨우 열반 상태를 유지하고, 바로 그렇게 뱉어낸 말이 정영문의 소설을 이룬다. 그 말이 작가의 손을 거쳐 문장을 이룬 후, 일군의 텍스트들로 모일 때, 그토록 어둡고, 지루하며, 무의미하고,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이야기 사슬, 즉 소설이 탄생한다. -김형중(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