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프랑세즈 단편소설 대상 수상작가, 로제 그르니에의 소설집 출간
탁월한 단편작가 로제 그르니에의 소설집 『물거울』이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 간되었다. 로제 그르니에는 단편소설의 영역에서 특히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장르를 완벽히 장악 하고 절묘한 지점에서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우수의 시인 로제 그르니에는 심원한 고독이 빚어내 는 소설 언어로 향수 어린 가락을 연주한다. 감동적일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탁월한 그의 단편들 은 일상의 비루함과 아프게 마주하게 하지만 가볍고 낮은 목소리, 안온함이 깃들인 특유의 부드 러움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시간이 망가뜨리는 삶. 그렇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시간이다. 삶은 마침내 실패하게 마련이지만 그 실패한 시간 속에 삶의 안타까운 진실이 있음을 작가는 아 픈 웃음이 배어나는 문체로 뛰어나게 보여준다.
무너지는 삶에 대한 증언과 향수, 그 애틋한 삶의 노래!
절망의 질곡 속에서 나직하게 반향하는 삶과 만남의 노래들, 특유의 깊은 울림으로 세상의 허무 와 그 안에서 움트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 무대 뒤의 인물들을 사랑하는 로제 그르니에는 남의 뒷전에 가려지고 지워진 모습, 이렇다 할 것이 없는 인생, 실패한 운명, 사라진 꿈, 고즈넉하지만 위협 속에 놓인 일상을 통해서 바로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엉뚱함, 부조리, 일상의 희비극, 쓰라림, 절망, 일회적인 낙관론과 대부분의 시간을 관류하는 비통함. 그가 바라보 는 세상은 간결하고 급박하며 부드러운 동시에 인상적인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과거를 거슬러올 라가는 대필작가와 한물간 연극배우, 보잘것없는 신문기자, 출판업자, 신경쇠약에 걸린 아내를 사 랑하는 남편, 그들이 엮어나가는 삶에는 은근한 슬픔으로 폐부를 저며오는 애절함이 깃들여 있다. 삶의 덧없음에 대한 애틋한 인식과 그 덧없음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귀중한 삶, ‘그 붕괴의 과 정’에 대한 수줍은 증언과 향수가 바로 그의 소설이다.
이 소설집에 담긴 5편, 「존재하는가?」와 「그 시절 사람」은 최근 출간된 단편집 『그 시절 사 람』에서, 「약간 시든 금발의 여자」와 「북경의 남쪽」은 『편집실』에서, 「카리아티드」는 『물거울』에서 선별한 것이다.
▶ 존재하는가?
자서전 대필작가인 나딘 라그랑주는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유명 여배우의 전기를 부 탁받고 그녀의 짧은 삶을 증거할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파랑만장한 삶을 살았던 전직 외교관과 실존하지 않는 여자의 흔적을 찾아 과거를 탐색하는 여행에서 밝혀지는 진 실. 그러나 조사에 조사를 거듭할수록 그녀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 그 시절 사람
한물간 중년의 여배우는 우연히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 학창시절을 추억한다. 기억의 환영에 사로잡혀 예전 그녀를 사랑했다던 어릴 적 친구에게 유혹당하는 그녀는 슬픈 경가극(經歌劇) 속 에서 무너지고 만다. 현재의 삶에서 불현듯 되살아나는 과거, 옛 기억의 마법에 걸려든 그녀가 보 게 되는 것은 환상이 휩쓸고 지나간 쓰디쓴 현실이다.
▶ 북경의 남쪽에서
과묵한 늙은 신문기자가 있다. 직장에서도 더이상 그를 취재현장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내란전문 가인 그는 중국에 관해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자신의 상상이 빚어낸 사실들을 기 사화한다. 그리고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 약간 시든 금발의 여자
광고회사의 편집자 피에르 부르주아는 어느 날 풋내기 삽화가인 미셸을 만난다. 순수하기만 했던 그녀는 삶과 마주하면서 조금씩 타락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는 피에 르, 그러나 몰라보게 변해 있는 그녀. 미셸은 늘 새로운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왠지 그녀가 고통을 몰고 오는 여자처럼 느껴질 뿐이다.
▶ 카리아티드
굴절시키는 물의 이미지에 투영된 삶의 모습. 신경쇠약증을 치료하기 위해 자크는 부인 모니크를 데리고 카리아티드라는 요양소로 향한다. 부인을 사랑하지만 부인의 친구와도 일회적인 사랑을 나누는 자크. 모니크의 병은 호전의 기미를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재발하여 불행의 시초를 암시 하지만 자크에게 희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감성에 깊숙이 드리운 정서적 울림, 생의 장중함이 살아 있는 소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마모되는 인간의 삶은 슬프다. 전복된 사랑의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아찔한 현기증, 시간이 유보시키고 있는 고약한 장난, 선험적인 일상의 고통스런 감정들을 감싸안는 로제 그르니에는 무기력하게 우리를 옭아매는 고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다양한 인간 삶을 매 개로 가장 직접적인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소설은 삶과 문학, 문학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 다. 로제 그르니에에게 모든 것은 어둠 속에만 잠겨 있지도, 그렇다고 행복으로만 점철되어 있지 도 않다. 그는 한없이 순박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가시를 품고 있으며, 순리를 따르면서도 불화의 씨를 던져놓는다. 공기처럼 가벼운 신랄한 문체는 때로 측은함과 가차없음을 보여주어 우리는 마 치 진흙탕을 지척에 둔 깨끗한 욕조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표현대 로 그는 한없이 보듬어주면서도 불시에 폐부를 공격하는 날카로움을 적절히 배합시킨다. 길흉화 복의 교차를 선보이며 삶의 잦은 위기가 빚어내는 슬픔을 읊조리는 그의 소설은 무심한 듯한 어 조의 깊은 울림으로 일상의 감동과 준엄함을 보여주며, 그의 단어 하나하나는 독자의 고독 속으 로 파고들어간다. 그의 소설은 아주 적은 단어만으로도 우리를 아주 아프게 만든다.
그르니에는 나직나직 이야기한다. 아주 단순하고 약간 쓸쓸한 이야기를. 비록 그것이 끔찍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다. 슬픈 이야기도 그의 목소리를 빌리면 어둡고 답답한 것이 아니라 바람이 조금씩 통하는 서늘한 이야기가 된다. 그 속에는 무엇인가 있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아주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김화영(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n\n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