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들이 가진 미학적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는 비평가.” _천희란(소설가)
“문학을 잘 몰라도, 평론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삶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할 수 있는 문학평론집”
문학평론가 이지은의 『소셜 클럽』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1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활동을 시작한 그의 첫 평론집이다.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두려운 말을 하겠습니다”(당선 소감)라는 묵직한 소회로 포문을 연 그의 지난 9년은, 한국문학장의 적소에 적재(摘載)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날들이었다. 인간과 텍스트에 관한 지극한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한 혜안, 눙치지 않는 단단한 논리로 하여금 ‘코어’가 있는 비평을 써온 이지은. 『소셜 클럽』은 그의 첫 책이지만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개성으로 축조되었다. 더불어 이 책은 기존의 평론집과 사뭇 다른 지점을 향해 기획되고 만들어졌다. 차라리 소설책에 가까운 판형으로, 오직 사회적 문제의식이 드러난 ‘주제론’만으로 묶은 『소셜 클럽』은 첫 평론집으로는 적이 다정한 파격을 감행했다.
제목 ‘소셜 클럽’은 ‘소설(小說)’을 ‘사회적인(social)’ 시각으로 ‘함께’ 읽어보자는 취지로 지어졌다. 세월호 사건, 페미니즘 리부트, 촛불 혁명 등을 거치며 2010년대에는 한국사회뿐 아니라 한국문학장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전회의 순간을 맞이했다. 광장과 책장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고민했던 페미니즘, 청년/공정/지방 담론, 역사부정론과 같은 요목들을 두루 성찰하며, 저자는 한국소설을 통해 우리의 삶의 조건과 그것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데 할애했다. 경직된 비평 언어나 수사적 향연을 지양하고, 요긴하다기보다 적실한 주제와 텍스트로, 문학과 사회의 불편하지만 흥미로운 진실을 함께 향유하고자 한다. 소설과 소셜이 포개어지는 넉넉한 광장, 문턱도 엄격한 가입 절차도 없는 『소셜 클럽』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문학이 포착하는 삶의 조건을 드러내어 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한쪽에는 역사가, 한쪽에는 동시대 사회가 버티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둘 모두 문학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구체적으로 세계와 자아의 갈등을 다루는 소설을 의미하는 것이니, 결국 ‘삶’을 중심에 두고 역사와 사회를 오갔다고 할 수 있겠다. (…) 이런 물음들은 나에게 문학과 삶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었고, 구체적인 삶을 재현하는 오직 문학의 언어만이 포착할 수 있는 삶의 진실에 대해 골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삶을 모순덩어리로 만들어내는 권력의 구조,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 그것을 해명하는 데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_「책머리에」에서
“우리의 세계가 자명한 미래에 잠식되지 않도록.”
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닌, 미래에 ‘개입’하는 읽기·쓰기
책의 본격적 서두를 장식하는 「광장과 책-장」은 황정은의 ‘dd’ 연작을 경유하여, 한국사회의 2010년대를 아카이빙하는 글이자, 당신의 ‘광장’은 어디였는지 또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고 되묻게 하는 평문이다. 광장과 책장, 이는 문학과 사회가 교차하는 이지은 비평의 키-워드이자 본령이기도 한 터. 이 광장은 책(의 광)장으로 이어져 “책장이야말로 투쟁의 장소”가 되며, “책을 솎아내는 것은 툴을 바꾸는 일이고, 이 새로운 툴로써 지의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것이 바로 혁명”(33쪽)이라는 설득력 있는 통찰로까지 뻗어나간다.
이지은의 문장을 읽다 감탄하고 또 안심하는 순간이 있다면, ‘사각의 탐문’이라 명명할 법한 인간과 텍스트의 그림자를 차분하게 응시하는 면모를 발견할 때일 것이다. 「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는 이기호와 윤이형의 소설 속 “착한 사람들이 시간에 마모되고 (…) 사건에 피로해질수록 그 선의는 조금씩 의심스러워”(36쪽)지는 순간들을 포착해, 선한 마음이 우리를 속이는 메커니즘을 조목조목 파헤친다. 선한 마음이 “개인적 죄책감으로 소모되고 말 때, 죄책감을 공동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전환하지 못할 때”, 그 부채감을 그저 ‘기억’하기만 할 때, “누군가는 이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50쪽)이라는 경고는 서늘하기까지 하다. “우리의 세계가 자명한 미래에 잠식되지 않도록”(51쪽) 우리는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관성과 타성에 저항해야 한다.
착한 사람들의 선의는 공동의 문제를 봉합해버리면서도, 봉합되어버렸다는 사실마저 감추는 기능을 한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우리의 선의는 어떤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선량함’은 실은 우리의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한 기만이다. 유가족이 광화문광장 찬 바닥에서 시위를 하고 있으니, 밥을 굶으며 절규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운 국을 먹을 때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마다 불편한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일까?” 그것은 애꿎은 사람이 우리를 ‘착한 사람’에 머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_「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40쪽)
저자가 진단하는 청년/지방 담론 역시 주목을 요한다. 장강명과 장류진의 소설 속, 힘겹게 응전하는 청년들이 결국 시스템에 복무하거나 재생산하는 오작동을 읽어내면서, ‘실패의 정확한 파악’을 강조한다.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고, 청년 탈출기는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 그 실패는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 성실한 실패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실패한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의 걸음을 꿈꿀 수 있다”(「청년 서사의 모색과 한계」, 79~80쪽)는 문장은 몇 번이고 되새겨봄 직하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거짓된 낙관 없이 더 많은 삶을 발견하길 요청하는 「‘지방-여성’의 장소는 어디인가」 역시 일독을 권한다.
역사와 인물이 교차하는 김숨, 조해진, 최은영의 소설은 저자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듯하다.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는 조선인 ‘위안부’의 삶을 다룬 김숨의 저작과 조해진 소설 속 인물들의 자기 재현을 분석하며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과 대면한다. 그리고 최은영의 『몫』을 통해, 그 질문은 “하나의 답안으로 막음 될 수 없고, 글을 쓰는 내내 안고 가야 할 물음”임을, “질문과 답을 반복하는 한에서 글쓰기는 실천적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음을,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반복 운동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로서 함께 상상할 수 있고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206쪽)음을 역설한다.
소설과 차트가 똑같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다고 해서 그 서사에 내재하는 욕망마저 동일하지 않다. 차트는 항상 과거의 궤적만을 그린다. 차트를 읽고 쓰는 일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도출’하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과거는 미래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데이터다. (…) 소설이 남기는 메시지가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그것은 미래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꿈꾸기 위한 것이다. (…) 비극으로 끝났다고 해서,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소설이 비극의 미래를 도출하려는 것이라 읽지 않는다. 소설은 차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읽는 일 또한 소설의 꿈을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개입’하는 일이다. _「구직-해직의 사이클과 연작소설」(110쪽)
끝으로 ‘Unreleased Track’이라는 명칭으로 미발표 원고 「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을 실었다. ‘파묘’ 작업과 ‘비평’ 작업을 유비하며 전개되는 이 글은, 영화 <파묘>와 황정은의 단편소설 「파묘」를 통해 2010년대 비평의 의의와 한계를 되짚어보고, 문학의 윤리의 향방에 대해 묵직한 직구를 던진다. ‘험한 것’들이 속출했던 2010년대를 지나 “한국문학은 사법적‧도덕적 심급 이상의 윤리를 탐구할 준비가 되었는가”(265쪽) 묻는 저자의 질문은, 앞으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비평세계를 예고/약속하는 것이자, 도래할 한국문학과 그 독자에 요청하는 제안이자 부탁으로도 읽힌다.
이지은의 『소셜 클럽』에 초대장이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지 않을까? “함께 갔으면 좋겠다. 아니 함께라야 갈 수 있다. 다른 세계로.”(「다른 세계로」, 253쪽)
오이디푸스가 끝끝내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보다 그 진실을 향한 돌진이 ‘충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할 때, 윤리학(ethics)은 진실을 향한 인간의 충동이라는 행동학(ethologie)으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윤리가 행동학으로 사유될 때 그것은 인간 존재론적 심급으로 육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문학(비평)이 새롭게 발견해야 할 오이디푸스란 진실을 향한 충동을 가진 인간일 것이다. _「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264쪽)
■ 작가의 말
2010년대에 평론 활동을 시작한 나는 우리가 처한 세계의 조건과 그 속에서 부침을 겪는 삶에 관해 소설을 통해 말을 건넬 수 있는 문학평론집을 기획해보는 일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국문학 평론장의 현재가 궁금하여 펼쳐 드는 책이라기보다, 삶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이 모순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여 소설책을 펼쳐 들 때, 그때 옆에서 맞장구도 쳐주고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책이었으면 했다. 거꾸로 이럴 땐 이런 소설을 읽어보라고 참견하는 오지랖을 부리고도 싶었다. 문학을 잘 몰라도, 평론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삶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할 수 있는 문학평론집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24년 여름의 초입
이지은
■ 추천의 말
‘소셜(social)’의 라틴어 어원들은 집합이라는 의미 외에도 연합, 동맹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회란 특정한 집단이나 영역이기 이전에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지은은 분명하지만 쉽게 망각되는 관계로서의 사회에 집중하며, 어느 때보다 정의와 공정, 연대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맞닥뜨린 정치적 딜레마와 좌절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복합적이며 입체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보편의 정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관계에 의해 역동하는 새로운 보편을 가늠케 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기실 그러한 태도는 창작자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지은이 드물게 창작자들이 가진 미학적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는 비평가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녀의 비평에서 강렬한 의미의 광휘를 부여하는 수사적 장식을 발명하기보다 작품이 지금-여기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는 순간들을 만난다. 갈수록 비평적 언어의 위계에 저항해야 한다고 느끼는 작가이자 여전히 비평의 통찰에 매혹될 준비가 된 독자로서 『소셜 클럽』의 초대는 한없이 기꺼웠다. _천희란(소설가)
■ 책 속에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유구하고 강고한 지의 세계, 즉 말하고 생각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인 ‘툴’, 그것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책장(冊-場)이야말로 투쟁의 장소가 된다. 책을 솎아내는 것은 툴을 바꾸는 일이고, 이 새로운 툴로써 지의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_「광장과 책-장」(33쪽)
지난해 12월 14일부터 사흘간, 세월호 참사 초기 해경을 비롯한 정부의 구조 대응이 적절했는지를 따지는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서 가장 많이 들렸던 말은 “모르겠다”와 “기억이 나지 않는다”였다. 이것이 바로 알 수 없는 과거이며 자명한 미래의 비극이다. (…) “우리를 제외한 세상 전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부채감”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냥 그 부채감을 기억”하면 된다고, “그것을 선한 마음으로 바꾸어 다른 이웃들에게 되돌려주면 된다”고 스스로 설득하고 사는 ‘나’의 믿음이 되레 거짓에 가깝다. _「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45쪽)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고, 청년 탈출기는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 그 실패는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 성실한 실패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실패한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의 걸음을 꿈꿀 수 있다. _「청년 서사의 모색과 한계」(79~80쪽)
루카치는 소설이 숨겨진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하고, 구축하고, 추구하는 장르라고 했다. 총체성은 자아가 세계 속에 유기적인 통합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을 지도 삼아 길을 찾을 수 있는 것. 곧, 세계가 인간의 낯선 외부가 아닌 인간과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 그것을 찾아내 드러내는 것이 소설의 미학이라고 했다. 그런데 (…) 그들의 삶은 세계의 흐름과 함께 나아가지 못하고, 구직과 해직 그리고 또다시 구직으로 이어지는 사이클(cycle) 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 삶의 연속성은 시간의 물리적인 속성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러니 진만과 정용의 삶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연작소설(short story cycle)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속적이되 독립적인 연작소설은 선후 관계가 크게 상관없으면서도 각 경험이 독립되어 있는 구직-해직의 사이클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_「구직-해직의 사이클과 연작소설」(103쪽)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각종 비리, 꼼수, 불공정에 대한 염증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지금에 이르러선 ‘공정=경쟁’이라는 의미가 되어버린 듯하다. 경쟁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공정하다고까지 느껴진다. 이러한 의미 연쇄 과정에서 경쟁을 심문할 기회는 삭제되고, 경쟁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가치중립적인 법칙으로 여겨진다. _「남편과 사파리 파크와 ‘산 자들」(125쪽)
교회의 가르침이 실패한 진짜 이유는 교회가 ‘나’의 질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초인간적인 신의 선함과 권능을 빌려 가르치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인간이 함께 살아갈 인간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여기에 종교와 정치의 차이가 있다. _「재생산노동력의 상품화와 여성 연대의 곤경」(110쪽)
실천이 결여된 읽고 쓰기, 부채감 해소를 위한 읽고 쓰기는 비판해야 마땅하나 당사자가 아님을 문제삼아 글쓰기의 자격을 묻는 것은 윤리를 가장한 입막음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글쓰기의 자격을 심문하거나 그 실효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면 각기 다른 조건 속에서 공통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고 만다.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_「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204~205쪽)
재일조선인은 “일본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을 해서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피식민지민의 대량 이주를 발생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나아가 누구든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거주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공동체적 이념에 근거하여,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 (…) 비국민의 희생에 기반한 시혜적인 배려는 비국민이 국민보다 더 나은 위치로 올라서는 순간 소위 ‘역차별’이라는 얄팍한 ‘공정론’으로 전환되기 쉽다. _「역사적 존재의 탈역사화, 그 ‘불공정’함에 대하여」(227~228쪽)
2000년대 비평이 ‘문학의 종언’에 맞서 주체의 심연에서 발견되는 윤리, 그것을 기반으로 다시 시작하려 했다면, 2010년대 비평은 심연을 탐사한다는 빌미로 생산된 폭력, 심연의 진실이라 믿어졌던 흉물스러운 실체를 캐낸다. 이 과정에서 ‘진실의 윤리학’은 사법적 진실의 수준으로, 옳고 그름의 도덕적 수준으로 얄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법적 정의의 실현조차 어려운 현실은 윤리를 세속적 층위에 단단히 붙들어 맸다. _「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260쪽)
2010년대 비평은 수고로이 캐어낸 험한 것들의 향방을 끝까지 주시했는가. 그것은 어느새 권력구조 속에 몸을 숨기고 지배적 질서를 강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한국문학은 사법적·도덕적 심급 이상의 윤리를 탐구할 준비가 되었는가. _「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