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인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첫 장편소설. “눈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크림반도의 풍경 속에서 메데야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메데야’는 그리스신화 속 여인 ‘메데이아’의 러시아식 이름으로, 울리츠카야는 이 소설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존의 메데이아 신화를 전복시켜 새로운 메데이아를 창조해낸다. 1900년에 태어나 격동의 세월을 살아낸 주인공 메데야의 삶을 통해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오롯이 담아냈다. 최종술 교수가 번역을 맡아 생생한 문장으로 옮겼고, 풍부한 내용의 해설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현대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그는 자국의 문학상은 물론 메디치상(프랑스), 주세페 아체르비 상(이탈리아), 세계문학상(중국), 박경리문학상(한국), 유럽문학상(오스트리아), 지크프리트 렌츠 상과 귄터 그라스 상(독일)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힌다. 1992년 중편소설 「소네치카」로 주목받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울리츠카야가 1996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 바로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이다. ‘메데야’는 그리스신화를 통틀어 가장 악명 높은 여인이라 할 수 있는 ‘메데이아’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러시아 고전문학의 사실주의 전통 위에 역사 · 신화 · 성서 등 풍부한 상호텍스트성을 지닌 문학세계를 구축해온 울리츠카야는 이 작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존의 메데이아 신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신화이자 안티-메데이아를 창조해낸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가족과 조국을 배신했지만 나중에는 그 남자에게 배신당해 자기 자식까지 죽이고 만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작품에서 꾸준히 다루어졌다. 소설 속 메데야는 그리스 여인 같은 외모, 훌륭한 몸가짐과 지혜로운 태도,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능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신화 속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메데이아와 달리 메데야는 직접 낳은 자식이 없고, 대신 수많은 형제자매와 친척들을 돌보며 다음 세대를 지켜낸다. 운명과 화해하지 못하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맞선 메데이아와 반대로, 메데야는 자기 운명에 순응하면서 운명에 상처 입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족의 울타리 안에 품는다.
그런데 메데야가 지키고 돌보는 가족은 혈연으로만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메데야의 가문에는 입양의 전통이 있으며,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식이나 혼외 자식도 동등한 구성원의 지위를 얻는다.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는 메데야의 동생 알렉산드라, 이모-조카 사이지만 자매처럼 자랐고 각각 ‘웃음’과 ‘눈물’을 상징하는 니카와 마샤 등, 매력적인 여성 인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가족의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한다. 그리하여 이 가족은 다양한 민족 · 문화 · 종교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크림반도는 이 작품의 배경이자 울리츠카야가 작품을 집필한 장소다. 가족이 피란을 가 있었던 바시키르 자치공화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울리츠카야지만, “만약 태어난 장소를 고를 수 있다면 고민 없이 남쪽을 고를 것”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크림반도에 대한 애정이 깊다.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은 모스크바도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아닌 크림지방, 게다가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계절인 겨울이 아니라 여름의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현대 러시아 소설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이 소설은 1900년에 태어나 혁명, 내전, 농촌 집단화, 대숙청, 전쟁, 강제 이주, 해빙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낸 메데야는 물론 가족 구성원들과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오롯이 담아낸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우정, 갈등과 비극은 “눈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크림반도의 풍경, 한과 슬픔이 서려 있는 러시아 역사와 얽혀들어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울리츠카야는 “이 소설은 옛 세대에 바치는 책이자, 어떤 의미에서 가족을 애도하는 나의 통곡이다”라고 말했다. 크림반도가 무력으로 합병되고, 가족적 가치가 상실되어가는 현재 상황에서 울리츠카야의 통곡은 더욱 뼈저리게 느껴진다.
추천사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하나의 마법을 낚기 위해 자신의 그물을 던졌다. 운명이 얽히는 어느 장소의 마법, 풍경의 마법, 무엇보다 주인공 메데야 멘데스를 둘러싼 마법을. _크리스타 볼프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는 현대 러시아 소설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가족 소설의 기념비적 작품. _데어 슈탄다르트
소련 역사의 씁쓸한 대차대조표를 보여주는 소설. _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본문에서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아이가 없던 메데야는 수많은 조카와 그들의 자식들을 크림에 있는 자기 집에 불러모아 조용히 비과학적으로 관찰하곤 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5쪽)
스키타이의 땅, 그리스인의 땅, 타타르인의 땅이었다. 비록 이제는 국영농장의 땅이 되었고 인간적인 사랑 없이 비통에 잠긴 지 오래지만, 재능 없는 주인들 때문에 서서히 황폐해졌지만, 그럼에도 역사는 그 땅을 떠나지 않고 봄의 축복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돌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가 이 땅의 역사를 떠올려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광경이 메데야의 집 변소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조카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합의가 이루어진 사실이었다. (26쪽)
그들 열셋이 남았다. 이제 막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시간도 채 갖지 못한 열세 명의 아이.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고 조총이 발사되는 가운데 치러진 몰살당한 선원들의 그 상징적인 장례식이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흡사 퍼레이드 같은 군대 오락으로 보였다. 1916년에 죽음은, 죽은 사람들을 거의 벌거벗은 채로 무덤도 없이 도랑에 묻었던 1918년 같은 야단법석을 아직은 떨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진 지 오래였지만 멀리 있었다. 이곳 크림에서 죽음은 아직 낱개로 팔리는 물건이었다. (42-43쪽)
그해 메데야는 열여섯 살이었다. 언니, 오빠가 다섯, 동생이 일곱이었다. 그날, 필리프와 니키포르, 둘은 없었다. 둘 다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 둘 다, 한 명은 적군赤軍에게, 다른 한 명은 백군白軍에게 죽었다. 평생 메데야는 그들의 이름을 추도문의 같은 줄에 적었다…… (44쪽)
겨울이면 그토록 고독하고 조용한 메데야의 지금 거처는 한창 휴가철엔 아이들이 넘쳐나고 대체로 사람들이 많아서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게 했다. 철제 삼각대 위에 올려놓은 거대한 통 안에서 쉴새없이 빨래가 끓어올랐고, 부엌에서는 늘 누군가 커피나 포도주를 마셨다. (…) 여름날의 그 야단법석에 익숙해지긴 했어도, 사교적이지 못하고 아이가 없는 메데야는 왜 태양이 지글지글 굽고 바닷바람이 때려대는 그녀의 집이 이 온갖 다양한 종족의 많은 사람을 리투아니아와 그루지야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끌어오는지 어리둥절했다. (66-67쪽)
조용하고 촉촉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게오르기와 마샤는 마음이 누그러져서 친근하게 서로에게 기댔다. 모든 언쟁이 저절로 멎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르지 못한 작은 창으로 목소리가 빛처럼 흘러나갔다. 반은 도둑들의 노래인 어렵지 않은 노래가 메데야의 농장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70쪽)
대다수 지역 주민들도 그랬듯이, 메데야는 바다에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후에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이주해 온 지금의 새 주민들과 메데야는 달랐다. 그들은 수영할 줄도 몰랐던 반면, 바닷가에서 태어난 메데야는 농촌의 주민이 자기 숲을 알듯이 이곳의 바다를 알았다. 물의 모든 습성, 물의 가변성과 불변성,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을부터 봄까지 변하는 물 빛깔, 온갖 바람과 물때를 알았다. 만약 메데야가 바다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면, 그녀는 혼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번에는 게오르기가 다 같이 가도록 그녀를 설득했다. (95쪽)
“백 년쯤 후엔 완전히 무너져내리겠네요.” 게오르기가 말했다.
메데야가 퍽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탸와 아르툠은 이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노인들과 아이들에게 백 년은 진지하게 말하기에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너무 긴 시간이다. (102쪽)
매력적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딸을 대하는 방식과는 왠지 다르게 아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애들한테 너무 엄격해.’ 아침에 노라는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애들한테 너무 관대해.’ 그녀가 낮에 내린 결론이었다.
‘저 사람들은 끔찍이도 애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있어.’ 저녁에는 또 그렇게 보였다.
감탄도 하고 부러워도 하고 비난도 했다. 그들이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 아이들에게 쏟고 있다는 것이 관건임을 그녀는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107쪽)
하지만 메데야에게는 삼십 년 전에 잃어버린 이 반지의 발견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건들 사이에는 일반적인 인과관계 이외에 때로는 명백하게, 때로는 비밀스럽게, 또 때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게 사건들을 관련짓는 다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마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5쪽)
이제 그가 깨닫고 있던 것처럼, 실로 그의 아내 메데야야말로 나름의 어떤 법규에 따라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이들을 기르고 일하고 기도하고 단식하며 보여주었던 저 조용한 고집은 그녀의 이상한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떠안은 의무,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두가 오래전에 폐기한 율법의 실천이었다. (246쪽)
그때까지 메데야는 산드로치카와 그녀의 첫아이 세르게이와 함께한 유일한 모스크바행을 빼면 평생 한곳에서 떠나지 않고 살았다. 혁명들, 정권 교체, 적군, 백군, 독일인들, 루마니아인들. 사람들이 내쫓기고, 다른 외지 사람들이 일가붙이 없는 땅에 이주당해 살았다. 그렇게 저절로 급속하고 격렬하게 변하던 삶을 떠나지 않았던 메데야는 종국에 돌바닥에 뿌리를 박은 나무 같은 단단함을 얻었다. (253-254쪽)
메데야의 기차는 십이 분 후에 다가왔는데, 사실 다섯 시간 늦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로스토프를 떠나고 나서야 왜 카밀레꽃 헝겊이 그토록 낯익었던지 깨달았다. 그때로부터 삼십 년 전, 화재 후 다른 많은 필수품과 함께 니나에게 선물했던 그녀 자신의 커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얘기했던 옛 크림에 사는 이모는 그녀의 옛 이웃 니나였고, 두 젊은 남자는 그날 밤 메데야가 화상을 치료했던 소녀의 자식들이었다…… 메데야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이 더 많아져서 세상이 더 북적거리게 되었어도, 세상의 구조는 여전히 바로 그녀가 이해하는 바 그대로였다.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모든 것이 함께 예쁜 무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262-263쪽)
“훔쳐선 안 되고, 죽여선 안 돼. 악을 선으로 만들 상황이란 없는 거야. 망상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무관해.” (282쪽)
또 메데야는 알도나가 영원한 모성의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저녁 늦게 그녀와 함께 앉아 그녀가 마련해둔 마가목 열매 보드카나 사과 보드카를 마시고 탄식도 했으면 싶었다. “아이고, 피곤해 죽겠네……” 푸념도 하고, 울기도 했으면 싶었다. 그러면 그때 메데야는 말없이 두꺼운 잔에 몇 번 입술을 대고 나서, 고생과 불행은 ‘무슨 죄를 지어서?’라는 질문이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으로 바뀌도록 주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이해시켜주고 싶었다. (302쪽)
어느 때보다 전환의 소용돌이가 강하게 일던 때인 1967년이었다. 빵은 무가치하고, 대신 입으로 전해지고 활자로 찍힌 말이 일찍이 없던 무게를 얻었다. 사미즈다트가 이미 은밀히 땅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시냡스키와 다니엘이 이미 형을 선고받았고, ‘물리학자들’이 ‘시인들’에게서 격리되었다. 봉쇄구역이 아닌 곳은 동물원뿐이었다. (317쪽)
“발레라, 그거 알아? 우리 가족은 좋은 전통을 하나 갖고 있어. 권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지. 내 가까운 친척 중에 유대인 치과의사가 있었어. 그분이 기막힌 농담을 하나 했어. ‘내 영혼은 소비에트 권력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내 몸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그 일을 맡으면 넌 소비에트 권력의 몸통을 계속 건드리게 될 거야……” 니카는 마지막 말 전에 가볍게, 아주 예술적으로 욕을 퍼부었다. (3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