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 스토리텔링과 서늘한 문장으로
운명을 지배하는 숨은 힘을 찾아나선다
첨단의 글쓰기로 문제작을 선보이며 발표하는 소설 모두 문학상을
수상한 미즈무라 미나에가 ‘죽어가는 엄마를 간병하는 위기의 딸’이라는
설정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을 때 뻔한 전개로 흘러가리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작가는
근대 가장 유명한 신파소설을 배음으로 깔고 일체의 감상주의를 걷어낸 ‘가족 서사’를 펼쳐보인다. 가차 없는 시선은 엄마와 남편뿐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을
향할 때에도 예외가 없다. 삶의 근원적 슬픔에 닿아 있으면서도 노화,
이혼, 죽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는
금전적 문제를 꼿꼿이 직시하는 서술에는 위엄마저 서려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울 소설은 뒤로 갈수록 결이 달라지며
독자들을 전혀 새로운 곳으로 끌고 간다. 그동안 이야기 위의 이야기,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를 써온 미즈무라 미나에의 야심은 『마담 보바리』와 『이방인』 그리고 우리에게 ‘이수일과
심순애’로 알려진 신파소설 『금색야차』를 연결하면서 여성 삼대를 지배해온 ‘이야기’의 정체를 깊숙이 파고드는 데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역자인 송태욱은 미즈무라 미나에의 소설을 “근대 일본문학사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과 같다고 말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미완성작 『명암』을 이어서
다시 썼던 데뷔작 『속 명암』이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새로 쓴 『본격소설』처럼 『어머니의 유산』 역시 문학사의 정전(들)을 이어서 또는 새로 쓰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품 표면에는 물론 어머니의 간병과 죽음을 둘러싼 여성 삼대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서사적 심층에는 서구의 고전들, 예컨대 『마담 보바리』 『이방인』 『적과 흑』 등의 소설과
오페라 <라보엠> 같은 이야기들이 번역 또는 번안을
통해 근대 이후 동아시아인들의 내면을 형성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이런 점이야말로
미즈무라 미나에의 독특한 소설적 세계이자 작법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유산』은 지금 여기,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작가 특유의 작법이 만나 겹겹이 풍요로운 눈부신 작품이
되었다.
책 속에서
딸은 그저 어머니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늙음의 끔찍함을 가까이서 직접 보는 고통—앞으로의 자기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 정신적인
고통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게 아닐까. 젊을 때는 추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늙음’이 두뇌와 전신을 덮칠 뿐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모두를 덮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을 향해 살아갈 뿐인
인생인 것인가._491쪽
너무 오랫동안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날이 왔다는 현실감이 없었다. _478쪽
어머니라는 존재—체념을 모르고 호시탐탐 틈을 노려 뭔가에 감동하고 살아 있다는 증거를 계속해서 찾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얼마나 역겨웠던가. 늙음은 잔혹해서 정신이 하늘 높이 비상하고 피가 끓어오르기를 아무리 원해도 감동을 생명의 원천으로 담을 수
있는 잔 자체는 해마다 얕아진다. 어머니가 인생에서 계속 감동을 찾는 모습은 결국 늘 굶주림과 갈증에 괴로워하는 아귀도에 떨어진 망자 같은 양상을
띠었다. 어쩌면 색에 빠지는 일이 불가능해진 인간이 다시 한번 쾌락의 찰나를 좇아 더욱 격렬하게 색을 찾는 것과 비슷했다. _490쪽
“그건 여자의 꿈 이야기야. 너는 신데렐라야, 우리 세대의.”
“이게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그렇지.”
“백마 탄 왕자도 없이?”
“그게 특별한 점이지. 오십대에 어머니만이 아니라 남편까지 없어지고, 금화가 지천인 큰
부자니까. 다른 여자가 들으면 화날 거야.” _530쪽
거기서 사라지는 것은 한 남자의
그림자만이 아니었다.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정신이기도 했다. 그것은
미쓰키의 정신을 가두는 정신이었다. _501쪽
“내 돈이 생긴 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오십대에 그 사람한테서 해방되었다는 게 기뻐. 오십대에 해방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행운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거든.”
“정말 그렇겠다.”
“게다가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장수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강해지고, 어쩐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건 나도 그래.”
어머니에게 휘둘리는 사이에 살아갈
욕망이 눈에 띄게 시들어갔다._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