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기괴한 웃음의 조화, 우화와 신비에 싸인 놀라운 이야기꾼의 재능을 발휘하며 발칸반도의 대가로 작가적 지위를 굳히고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장편소설 『H 파일』이 출간되었다. 2000년 문학동네에서 『H 서류』로 출간한 작품의 개정판으로, 새로운 번역과 편집을 통해 유머와 아이러니가 가득한 원문의 묘미를 살렸다.
대문자 H, 호메로스의 수수께끼를 사이에 둔
권력과 예술을 좇는 자의 동상이몽
1930년대 알바니아 북부 고원지대.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전해져온 호메로스 서사시의 신비를 밝히려는 두 명의 아일랜드인 연구자가 N시에 도착한다. 조용하기만 하던 이 시골 마을은 당시로선 놀라운 발명품인 녹음기를 들고 나타난 수상쩍은 두 외국인 때문에 묘한 혼란에 휩싸인다. 이들이 스파이임을 의심하는 시장은 믿을 만한 정보원 둘 바자야에게 몰래 감시를 명하고, 엿듣기에 관한 한 최고의 귀를 자랑하는 둘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유려하고 시시콜콜한’ 보고서를 시장에게 올린다. 보고서 내용보다 둘의 글솜씨에 관심이 더 많은 시장이 두 외국인의 체포를 숙고하는 사이, 이방인의 방문에 들뜬 시장의 아내 데이지는 또다른 백일몽을 품고 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무한대의 시공간 속으로 울려퍼져야 할 서사시의 소리를 억지로 한곳에 가둬놓는 녹음기를 ‘악마의 기계’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수상쩍은 세르비아 수도사의 등장으로 두 외국인은 발칸반도 민족분쟁(알바니아와 세르비아 간의 민족감정)의 한가운데로 휘말려들고 만다. 두 학자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수수께끼에 한 발 한 발 다가서지만, 사건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복잡한 결말을 향해 치닫고, 소멸의 운명에 이른 서사시의 장엄한 시간과 한갓 정치적 우화극에 갇힌 인간 운명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절묘하게 맞물려 전개된다.
『H 파일』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탁월한 위인이자 ‘위대한 장님’인 호메로스에 대한 경의를 바닥에 깔고 있다. 또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창작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두 학자의 탐색 과정에서 제기되는 의문들은 작가 자신, 스스로의 글쓰기에 대해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카다레가 1979년 터키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미국인과의 짧은 대화, 즉 호메로스 서사시의 자취를 찾아 알바니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던 미국인의 얘기에서 영감을 얻어 써내려간 이 작품은 1980년대 초 『넨토리』지에 발표되었을 당시 알바니아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알바니아의 전설을 소재로 다루면서, 알바니아에 거류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든지 감시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사소한 행적, 몸짓, 말 한마디까지 모조리 감시했던 공산정권의 스파이 활동, 전제적 정치 상황의 부조리를 소설에 빗대어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스꽝스러움과 진지함, 착각과 오해, 덧없는 열정들을 향한
슬픈 조소와 유쾌한 코미디
이스마일 카다레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정치적 음모, 오해, 무지, 허영 따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 운명의 비극적 아이러니다. 인간과 역사의 신비와 위엄을 보여줄 서사시가 당대 인간들의 한낱 초라한 사적 욕망인 민족감정에 휘둘려 파괴되는 것, 그리하여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려던 수수께끼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 서사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떠났던 사람들이 수수께끼 같은 서사시가 되어버리는 것이 “논리로도 죽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러운”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러나 『H 파일』에선 이러한 무거운 주제가 흥미롭게 희화화되어 나타난다. 아내가 바람피우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데만 관심을 쏟는 시장과 엿듣기의 달인이자 빼어난 글재주의 소유자인 스파이 둘 바자야의 관계, 두 학자를 스파이라고 믿는 엉뚱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웃지 못할 사건들, 알바니아 판 보바리 부인을 꿈꾸는 시장 부인의 몽상 등은 장난스럽고 절묘한 웃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엔 죽음과 파괴의 그림자가 너울대고 있어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깊은 희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가 선사하는 내밀한 감동과 소설적 묘미
그리스신화와 비극, 알바니아의 신화와 전설, 게르만 민요시, 셰익스피어 희곡 등은 이스마일 카다레 작품의 뿌리깊은 바탕이다. 카다레는 작품 속에 전설과 신화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녹여내면서, 속되고 덧없는 운명에 갇힌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집단적 혼이 살아 숨쉬는 보편적이고도 영원한 세계를 그려낸다. 알바니아 기사(騎士)들의 이야기에 특히 자주 등장하는 ‘저주받은 산정’은 『H 파일』의 두 주인공이 호메로스 서사시의 수수께끼를 탐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비한 서사시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교차시키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대가의 근원적인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절묘한 풍자와 장난기가 번뜩이지만 깊은 재미와 사색의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H 파일』은 한 구절 한 구절 놓칠 수 없는 소설적 묘미와 불가사의한 문학의 내밀한 감동을 전하는 걸작인 동시에, 의심과 오해, 무지가 빚어내는 ‘우스꽝스러운 비극’을 참을 수 없는 유쾌한 희극으로 펼쳐 보이는 탁월한 풍자 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