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
흙으로 빚은 우리네 질그릇이 그렇듯 거칠고 투박해서 아름다운 글이 있다. 길 위의 시인 유용주가 새 산문집 『우리는 그렇게 달을 보며 절을 올렸다』를 들고 우리 곁에 돌아왔다. 14세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공사장, 한중일 식당, 제빵공장, 유리공장, 사탕공장, 술집, 우유보급소, 군대, 형무소 등 온갖 인생 굴곡을 겪으며 시와 소설을 써온 문인답게, 이번 산문집에서 저자는 장수의 지역민으로, 농민(노동자)으로, 문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더러는 울분에 찬 어조로, 더러는 따뜻한 눈길로 세상을 마주한다.
“그럴 것이었다. 인생이란 게 적은 빗물에도 골이 패고 버석거리는 마사토처럼, 아무리 밑거름 두둑이 넣고 잡풀 뽑아 비료만큼이나 땀 흘려 하루해를 업어 키운다 하더라도, 억세기가 청상과부로 평생을 늙어온 시어머니보다 더 질긴데다가 벌레 또한 제집이나 된 듯 무시로 드나들어 구멍 숭숭 뚫린 가을배추 신세라면 적금통장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폐보다는 떨렁거리는 동전 몇 닢으로 남을 때가 꼭 있는 법이다.” _172쪽
아름다움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에 있다
저자의 단호한 발언들은 이번 산문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절대로 화합을 못한다. 포용하거나 소통할 생각이 없다”, “가만있지 않겠다” 등 체면 때문에 혹은 가면 때문에 말하지 못한 죄의식들을 당당하게 터트린다. 이것이 반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시인 유용주가 선택한 아름답게 사라지는 법이다. “낙엽이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에 있다. 썩어 거름이 되어야 이듬해 봄에 꽃피울 수 있다”며 정부와 예술원, 그리고 노욕에 사로잡힌 타락한 문인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면서도, 최근에 작고한 어느 한 선배의 소설 작품에 대해서는 “글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는 소멸(消滅)이 아닌 소생(甦生)을 말한다.
“인간이 모두 없어진 지구를 상상해보자. (…) 무덤과 비석이 사라진다. 모든 무기가 잠든다. 거기에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강이 깨끗해지고 (…) 눈비가 오시고 구름이 흘러 다니고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해와 달이 제시간에 뜨고 진다. 노을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별들이 노래한다. 나무와 풀이 자라고 이슬과 안개가 춤을 춘다. 거기에 벌레와 짐승이 뛰어논다. 우주와 은하가 장엄하게 자유로운 그림을 그린다. 어떤 음악이 있어, 이 황홀한 연주를 막겠는가.” _84쪽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산문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아름답게 사라지는 방법’은 한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사라지기 위해 남기는 죄의식의 기록이다. 2부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32년을 시인으로 살아온 저자가 작가의 민낯을 거침없이 폭로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3부 ‘섬으로 부치는 편지’는 심상의 한 축을 만든 추억들을 담았다. 4부 ‘내 인생의 음악’은 글과 문학을 향한 저자의 애정이 담긴 시평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