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반드시 세 명을 낳아야 한다고 난리를 쳤었던 그다.”
기억의 도돌이표 속에서 목도한 진실, 나무꾼이 없는 세상을 꿈꾼 선녀의 ‘죽여버릴 결심’
평범한 가정주부 유지안은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불이 난 것을 목격한다. 급히 아파트에 도착한 그는 자신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아들 배성이를 걱정한다. 다행히도 무사히 구출되어 경찰의 품에 안겨 있는 아들. 하지만 지안은 어째선지 바로 경찰과 아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못된 생각을 한다.
“삐용삐용 거리는 아파트 앞에서 배성이를 데리고 가는 경찰을 보았다.
길 건너 아이를 보는데 기분이 묘하다.
문득 나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어쩜 저렇게 유별나서 수업도 끝내지 않고 무작정 집으로 달려왔을까.
집에 뭐가 있다고. 엄마인 나밖에 없는데 뭐가 있다고 말이다.” _『기억의 해부학』 上 006~009p
이번 화재로 남편을 잃은 지안은 배우자라는 이유로 화재사건의 제1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는다. 지안은 아무것도 몰랐다며 남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경찰은 어딘가 이상하다. 너무도 완벽한 지안의 알리바이. 어차피 ‘남편 죽은 여자’로 불릴 불쌍한 여성에게 경찰은 자꾸만 의심이 든다. 겉으론 별다른 외상이 없는 남편의 시체만이 사건의 열쇠라 생각한 경찰은 제1용의자이자 망자의 유일한 보호자인 지안에게 부검 동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어 임혜정이 화재사건의 두 번째 용의자로 경찰에 잡혀온다. 죽은 남편과 몰래 바람을 피워온 그는 상간녀라는 이유로 자신을 조사하는 경찰이 못마땅하지만, 경찰서에서 본처인 지안을 발견하고 사색이 된다. 하지만 지안은 혜정을 보고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기만 한데… 그 순간, 화재사건 당일부터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는 지안의 기억.
“아이를 가질 여건도 상황도 되지 않는데 꼭 아이를 일찍 낳아야 한다고
그것도 세 명을 낳아야 한다고 난리를 쳤었던 그다.
금가락지도 팔아야 할 여건에 회사 다녀와서 애들 보고 애들 돌보다 회사 가고,
여유 있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세영은 셋째를 원했다.” _『기억의 해부학』 上 079~081p
경찰의 품에 안긴 아들을 바라보던 지안의 공허한 눈은 무슨 의미였을까. 지안의 기억은 남편을 잃은 피해자의 기억일까, 남편을 죽인 피해자의 기억일까. 믿을 수 없는 인간의 기억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기억의 도돌이표 속에서 목도한 진실, 섬뜩하고 슬픈 ‘선녀와 나무꾼’
『기억의 해부학』은 세 명의 아이를 바라는 남편과 도망칠 수 없는 아내의 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에서 시작된다. 선녀인 아내는 아이를 두고 도망칠 수 없지만, 지안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을 자신의 저울 위에 올려본다. ‘나는 엄마가 되지 못한 건가? 아니면 인간이 되지 못한 건가.’ 이야기가 흐르는 내내 담담하게 이어지는 지안의 내레이션은 어머니이기에 앞서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냉정함과 서늘함을 보여준다.
이어 지안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장면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자아낸다. 하나씩 밝혀지는 지안의 사정과 서사가 쌓이며 동일한 장면이 전혀 다른 장면으로 변모함과 동시에, 걱정 어린 엄마의 말은 섬칫한 독백으로 다가온다. 힘없어 보이는 여성이 살인자인지 아닌지를 두고 진실을 좇는 서사 구성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웹툰 플랫폼 ‘피너툰’에서 연재된 전체 33화를 총 두 권에 실었으며, 보편적이고 정통적인 출판만화 문법과 연출에 가장 가깝게 편집했다. 전래동화의 재해석, 다층적인 서사 구성이 어우러져 새롭게 태어난 오늘날 가장 섬뜩하고 슬픈 ‘선녀와 나무꾼’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