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펴내는
난다의 >걸어본다< 두번째 이야기
소설가 강석경이 걷고, 보고, 쓴, 경주!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
더없이 고도다운 그곳, 경주에 관한 이야기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 난다의 걸어본다 그 두번째 이야기의 개정증보판을 펴냅니다. 2014년 처음 출간된 책에 2022년까지 새롭게 쓴 다섯 편의 원고를 더해 펴내는 ‘걸어본다 경주’는 소설가 강석경이 시작에서 떠남까지 구성한 경주에 대한 완결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주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 표지와 책의 꼴을, 곳곳의 문장을 공들여 매만졌습니다. 좁게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넓게는 내가 사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의 산책길을 뒤따르는 과정 속에 저마다의 ‘나’를 찾아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는 ‘용산’을 테마로 한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책으로 그 포문을 연 바 있지요. 예고했던 바와 같이 다음 배턴을 이어받은 이는 소설가 강석경입니다. 강석경, 하면 경주, 하고 즉시 답하게 되는 일이 새삼스럽지 않은 데는 그의 많은 저작의 경우 그 소재나 주제에 있어 ‘경주’를 배경으로 삼은 일이 꽤나 빈번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사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글쓰기의 정신적 지주로 어떻게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지칠 줄 모른 채 경주만을 지목하고 경주만을 주목할 수 있었는지 작가의 고집에 실은 강한 호기심을 품어오던 저이기도 했습니다.
경주를 주제로 또 언제 산문을 묶겠는가. 소설가 강석경은 단단히 작정을 한 참이었습니다. 지난 2004년부터 2022년까지 근 십팔 년간 쓰고 또 쓴 글을 정리하는 작업은 그러나 그리 만만치만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 챕터씩 완성될 때마다 작가는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그 가운데 밑줄 긋고 옮겨 적으며 여러 번을 되새기게 한 문장이 있었으니 살짝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고향이란 육신이 태어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이다”라는 한 줄이었지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우리가 왜 저마다의 산책으로 자기만의 고향을 마음에 품어야 하는지 흡사 ‘걸어본다’의 정의에 대한 절묘한 힌트를 얻은 것도 같았습니다.
더없이 고도다운 그곳 경주에 관한 이야기. 강석경만이 쓸 수 있고 강석경밖에 쓸 수 없는 그곳 경주만의 이야기. 소설가 강석경. 1973년 제1회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데뷔했으니 그가 작가의 삶을 이어온 것도 오십여 년 세월이 되어갑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소설 『숲속의 방』으로 일찌감치 예민하면서도 유려하고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로 80년대 대학가에 청춘의 심벌로 읽히기도 했던 작가는 삼십대에 경주의 향토사학자인 고 윤경열 선생을 인터뷰하는 일을 계기로 경주에 매료되어 짐을 꾸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경주라는 땅 곳곳을 무한한 정신으로 매일같이 걷고 매일같이 보고 매일같이 탄복해오고 있다 했습니다. 어쩌면 이 천오백 년 전의 능들이 세월을 품고 이지러진 고즈넉한 경주와의 만남이 소설가 강석경을 늘 새로움으로 채우고 또 비워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산 자와 죽은 자가 인류의 가족으로 더불어 있다니. 고분들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이지러지기도 하고 주검은 어느덧 대지로 돌아가 둔덕 같은 자연 자체가 되어 있었다. 생멸의 순환과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풍경은 근원적이어서 강렬하게 가슴에 다가섰다.
_「헤매다 경주를 찾았지」 중에서
강석경만이 쓸 수 있고 강석경밖에 쓸 수 없는 그곳, 경주에 관한 이야기
비어 있기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다시 말해 모두가 아무것도 없다고 발길을 돌려버리는 월성과 같은 신라의 왕궁터를 작가는 어떤 연유로 매일같이 산책하게 되었을까요. 속절없이 크고 속절없이 둥글며 속절없이 수가 많은 능으로 보건대 경주는 거대 무덤의 도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권이 무슨 소용이랴, 저 녹색 빈껍데기가 죽은 뒤에 다 무슨 대수냐며 삶과 죽음의 허망함을 논한다 할 적에 경주라는 흑백의 유적지는 매순간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지구의 독생자처럼 헤맸으나 경주에 와서 비로소 신라라는 정신의 고향을 찾았다는 작가의 고해성사 같은 고백. 그만큼 절실했다는 얘기겠지요.
신라 김씨 왕조가 유목민이라는 학설을 접하고 느낀 신비로움이라니. 그것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었다. 자연과 자유를 사랑하는 나의 본성에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그래, 대릉원의 담 밑을 지나갈 때마다 습습한 건초 냄새를 맡으며 자기 문명에 소외되지 않았던 유목민인 나의 전생을 상상하곤 했다.
_「대릉원에서」 중에서
작가의 두 눈과 두 다리가 투과하고 겪어내는 경주 전역은 단순한 듯 복잡하고 복잡한 듯 단순합니다. 인구밀도가 높은 것도 넉넉한 땅 넓이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어서 겉보기에 숨죽여 고여 있는 듯해도 여전히 경주 땅 곳곳에서 건강하고 우렁찬 울림이 전해지는 것은 천년 고도 시절부터 뜨겁게 피를 뿜어내는 자연이라는 혈관이 그 몫을 단단히 했을 겁니다. 자연이야 어디든 있지만 경주에선 도심 한가운데서도 자연을 점유할 수 있으니, 경주라는 도시에서의 삶이란 곧 자연을 제 근처에 두는 방식일 겁니다. 건축이 제한된 고도라 녹지 면적이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경주는 그 덕분에 사계절의 변화를 훨씬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작가는 용장사지에서, 계림로에서, 괘릉에서, 동궁과 월지에서, 황룡사지에서, 대릉원에서, 월성에서, 산림환경연구소에서, 남산동에서, 무열왕릉에서, 교동에서, 박물관에서, 인왕동에서, 황오동 골목에서, 노서동 고분공원에서, 진평왕릉에서, 식혜골에서, 오릉의 겨울 숲에서, 북천에서, 성덕대왕신종 앞에서, 동남산 아래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차례로 살아냅니다. 삶으로 살아본 이가 아니라면 결코 쉽게 붙일 수 없는 산책자의 팁 같은 것을 발 내딛는 곳곳마다 얼마나 야무지게 붙여놨는지 그 절묘함이 뒤따라 걸어보려는 자에게는 얼마나 절박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발로 또 절로…… 자연과의 일체감은 이렇듯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천년 고도의 속도 저 느림, 경주에 관한 이야기
전국에서 신호등이 가장 늦게 들어온 지방이 경주라고 한다. 신호등이 설치된 후에도 경주 사람들은 차가 오거나 말거나 여유만만하게 길을 건넜다고 한다. 외지인에게 경주의 인상을 물으면 느림에 대해 말한다. 시대의 흐름에서 비켜난 듯한 고도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보수적인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 내가 경주에 사는 것은 느림을 존재의 방식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_「영악함 없는 이 느림」 중에서
이 책은 빠르게 읽히지 않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무섭게 넘어가는 속도를 자랑하는 여타의 책과 달리 한 문장 한 챕터의 여운을 느리고 길게 끌고 갑니다. 교과서는 아니지만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이 즐비한데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철학적 몽상들의 무게 또한 그 근이 꽤나 나갑니다.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은 유물들 또한 눈으로 확인하고 머리로 이해한 뒤 가슴에 새겨야 하는 순리적인 과정이 담보되어야 하기에 단번에 읽어내기에는 실로 역부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밀쳐둘 수가 없는 책입니다. 답사기일까 역사책일까 소설책일까 시집일까 면면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이 책을 소화해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리하여 역시 ‘느림’밖에 없다는 길로 이어집니다. 필연적인 과정이지요. 산책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한 느림.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정리하자면 아마도 자연, 예술, 사회, 이 셋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예술은 늘 나를 감동시키고 자연은 나의 근원이며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도 자기정체성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조건이다”라며 발전이라는 허명을 뒤집어쓴 온갖 문명의 이기를 탐하는 우리 사회의 허망한 욕심에 대한 쓴소리를 자주 내뱉기도 하였지요. 풍요는 또다른 빈곤을 가져오고 진보는 파괴를 동반하나니…… 변하는 건 산천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왜 자꾸 잊는 걸까요.
경주 출신의 화가 김성호의 경주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 글과 한몸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알다가도 모를 그 삶이라는 게 뭔가 싶은지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주춤거림이 일었습니다. ‘경주’와 천년 고도 ‘신라’와 ‘나’라는 사람. 어떤 ‘근원’에 대한 우리들의 갈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헛헛함일까요. 경주는 어디에서 왔으며 천년 고도 신라는 어디로 갔으며 우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들 가려는 걸까요.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끝나는 책의 귀함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 경주로의 여행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오랜 지표이자 지도가 되길 감히 꿈꿔봅니다.
ps.
책 뒤표지의 날개를 펼치면 경주 산책 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작가의 입을 빌려 소개된 경주의 모든 곳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각자 편의껏 산책 코스를 짜보시라는 의미에서 시도해본 작업입니다. 경주를 걸으실 때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