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다가오는 언어들을 끌어모아 쓰는 글
미하엘 엔데는 1929년 남부 독일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초현실주의 화가인 에드가 엔데와 물리치료사 루이제 바르톨로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화가나 작가들이 찾아오는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생의 첫 10여 년을 나치 독일 치하에서 보내면서, 전쟁과 폭력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를 체험했다. 아버지의 그림들이 ‘퇴폐예술’이란 명목으로 금지돼서 가족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힘든 시기 속에서도 엔데의 예술가적 재능은 꾸준히 자라났다. 그는 글 외에도 그림과 연극 등 다방면의 예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전쟁이 끝나고서는 오토팔켄베르크 드라마 학교에 다녔고, 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엔데는 직접 자신의 첫 희곡 「유산 상속 게임」을 거론하며, 그에 얽힌 일화도 함께 이야기한다. 그가 연극의 구조를 공부하면서 체득한 희극성과 비극성은 이후 그가 쓴 장·단편 소설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엔데가 무엇보다 천착했던 주제는 다름 아닌 이야기 그 자체다. 도시오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생각은 재차 드러난다. 엔데는 삶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인과 논리’ 너머의 것이라 강조했고, 이에 따라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따라가는 ‘이야기 논리’의 껍질을 깨트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예술에 특정한 목적이나 기능을 부여하려는 생각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예술의 무익함에 큰 방점을 뒀다.
또한 엔데는 이야기하는 이와 듣는 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글을 썼다. 젊은 시절에 만난 팔레르모 광장의 이야기꾼이 읊어주던 소설을 듣고서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메르헨의 이야기꾼이 들려줄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겠노라 결심한 일화는 그가 이야기의 어떤 점을 중시하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이처럼 오래도록 읽히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결심은 추후 『짐 크노프』 시리즈,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부터, 『거울 속의 거울』이나 『자유의 감옥』 등의 작품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이미 초기작 『기관차 대여행』으로 독일 아동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큰 성공을 거뒀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더욱 다가가고 싶은 문학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10년의 기나긴 노력을 통해 집필한 작품이 바로 『모모』다.
엔데에게 있어 언어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재료인 동시에,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였다. 그에게 언어란 인간의 문자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각자 형식이 다를 뿐 현실 곳곳에서 마주하는 색채나 소리 역시 다른 방식의 언어라고 본다. 언어는 이미 세계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에,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닌 이미 ‘거기’에 존재하거나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 같은 증언은 자신이 글쓰는 방식이 “작가보다 화가에 더 가깝다”라던 말을 보완하고 있다. 엔데는 자신에게 우연히 다가오는 언어들을 끌어모아 서로 조화로운 그림을 만드는 데 가장 집중했다고 한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중요시하는 일이 “그 자체로 조화로운 ‘그림’의 세계를 찾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 같은 태도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놓치기 쉬운 정신세계를 향한 몰두로 이어지고 있다.
삶 너머를 바라보기
이 책에서 엔데가 언어나 이야기만큼 자주 언급하는 주제는 바로 현대사회에서 사라진 정신성이다. 엔데는 신체 능력 등 물질적 가치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삶의 근원적인 면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권한다. 엔데가 아시아 문화에 특히 관심을 품고 탐구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태도와 연결되는 듯하다. 그는 현대사회가 환상이나 영성 등의 정신적인 가치를 잊어가는 모습을 경계했다.
그런 엔데에게 언어란 정신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표이자 세계의 구성 요소 그 자체다. 그는 언어를 인간의 소통 양식에 국한하지 않으며, 나무의 생장이나 새의 울음도 또 다른 언어의 형식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세계의 다양한 층위를 향한 깊은 애정이야말로 미하엘 엔데가 그려낸 섬세한 환상의 원동력일 것이다.
엔데의 비판적 사고를 현대적 가치관이나 과학적 사고에 대한 비난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그보다는 엔데가 오늘날 자연과학적 사고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세태를 중점에 두고 비판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요소를 기존 과학의 영역으로 치환하여 그 안에서만 해석하려 하는 태도를 하나의 선입견으로 명명한다. 이때 ‘선입견’은 엔데가 글쓰기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인과 논리’와도 연결된다. 그는 기존 지식이 만드는 경계 너머에서 세계를 보려는 태도가 우리 삶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과연 엔데가 말하듯 “새로운 자세”를 취하는 인간들이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을까?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세계에 사는 독자가 꾸준히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미하엘 엔데라는 정원을 거닐기
엔데는 자신의 책이 “여덟 살부터 여든 살까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성인이 되어서 그의 책을 다시 읽어본 독자라면 이 말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가 그려낸 수많은 환상의 나라는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과 탐구심을 가져다준다. 엔데가 그리는 마법이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는 수단이 아닌,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탐구하게 만드는 상징으로 읽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좋은 환상은 우리를 다시 어린아이로 만들며, 세계 곳곳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한다.
인터뷰어 다무라 도시오는 엔데의 친구이자 번역가이며 애독자다. 그는 엔데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미하엘 엔데라는 정원을 무작정 거니는 것만 같았다”고 추억한다. 정원이란 꽃이 가득한 화단이나 계절에 따라 다른 색의 잎사귀를 흔드는 나무만큼 ‘여백’이 중요한 공간이다. 다무라 도시오의 말에 따르면, 그 여백이야말로 정원의 본질이다.
미하엘 엔데와 다무라 도시오의 대담은 엔데가 만드는 이야기의 여백을 거니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작가의 예상치 못한 인간적인 모습을 만날 수도 있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적 정서에서 오는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다만 여전히 분명한 사실은 엔데의 이야기들이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야기’란 엔데가 문학적 언어로 엮어온 것뿐만 아니라, 그가 이 대화에서 꺼내는 여러 장면도 함의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만들던 연극이나, 팔레르모 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야기꾼이 우렁찬 목소리로 들려주던 소설, 투병생활 중에 마주친 일상의 유머러스한 순간까지, 엔데는 자신의 삶 속에서도 꾸준히 빛나는 순간들을 발견하여 묘사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조를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향의 글쓰기를 거부한다. 그의 문장들은 글쓰기의 순간 우연히 마주하는 발견을 소설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로써 엔데의 이야기는 독자들을 한층 더 낯설고 넓은 세계로 불러들인다. 그 과정을 묘사하는 엔데의 말을 읽어나가다보면 앞으로 마주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사뭇 고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