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 「가정 사정」은 2020년 김유정문학상 후보작으로, 아내와 아들을 불시에 잃고 남겨진 부녀가 처음으로 둘만의 새해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다. 고층빌딩에서 떨어진 종잇조각을 치우며 자신이 과연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는지 돌아보는 노년의 아버지와, 나이들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며 그마저 떠나고 홀로 남겨질 자신을 막연히 그려보는 중년의 딸은 서로를 더욱 배려하고 생각해주려 하지만 그 방식 때문에 조금씩 어긋나곤 한다. 실제로 2018년 한 대기업의 새해맞이 불꽃놀이 행사로 빚어진 꽃가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잘 녹지 않는 종이 꽃가루와 같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들의 생활이 결국에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다정한 위트와 함께 남겨놓는다.
「양파 던지기」 「이만큼의 거리」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가족을 둔 자살생존자들의 일상을 다루며 원망과 후회가 뒤섞인 유가족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바늘 같은 언어로 세밀히 묘사한다. 작가는 그러나 ‘남겨진 자’들이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한다. 그들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하고, 굴욕을 참고 생업을 이어나가며, 상실감을 공유한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 걷는다. 결국 서로를 지탱하는 건 서로임을 알기에 이들은 부족한 손을 맞잡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모르는 청년의 일로 가슴 아파하는 아주머니에게 인주는 말했다. 왜 슬픈 이야기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줄까요. 인주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슬픈 이야기들이란 사실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_「개인 사정」,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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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수리중」과 「양파 던지기」는 안전한 삶을 욕망하는 부부의 이야기로, 이뤄낸 꿈과 잃어버린 꿈, 그리고 그 속에서 흔들리는 관계를 묘사한다. 「내부 수리중」의 기태와 연호 부부는 녹록지 않은 환경에도 쉬는 날 없이 일하며 ‘내 집 마련’과 ‘내 업장 마련’이라는 두 가지 큰 꿈을 이루었으나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상처 때문에,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몰래 괴로워한다. 「양파 던지기」의 원진은 식물 세밀화를 그리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 대신 안정적인 직장과 결혼을 택한다. 중년의 나이에 좌천되다시피 고향 근처로 일터를 옮기게 된 그는 미국으로 떠난 아내와 아들에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게 된 두 작품의 부부는 서로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상대방의 온도를 실감한다. 아직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변화를 알아차리는 그들에게서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관계만의 애틋한 연대감이 느껴진다.
불을 켜야겠어, 여보. 아내가 산의 젖은 흙을 여기저기 묻히고 있는 기태를 봤다. 기태가 가진 불안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빛으로. 이제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시작된 지 구 일 후 수색은 성과 없이 종료된다는 것과 그 일과 무관한 듯 조금씩 나빠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아내가 지금부터 자신들이 시도하는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밀어내는 힘으로 가게문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보여서 기태는 자신의 부족한 손으로 얼른 아내의 손을 맞잡았다. _「내부 수리중」,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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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한 사람」 「한방향 걷기」 「개인 사정」은 각각 교회 내 성폭력과 가정폭력, 자녀 살해 후 자살로 트라우마를 겪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가족과 따뜻한 한마디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정작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겨우 다할 뿐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킬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아픔은 결국 용기가 되어 곤란을 겪는 가족을 돕는 데에 쓰이고, 가족을 향한 미움은 서서히 타인을 향한 통찰과 연민으로 바뀌어 누군가를, 그리고 스스로를 일으키는 힘이 된다. 이해와 용서로 뭉뚱그려지는 전통적인 가족 서사의 결말에서 벗어나, 작가는 함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가족이자 동반자의 범주에 포함시키며 달라진 시대의 가치를 긍정한다. 그러나, 김미정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작가는 긍정하는 것으로만 소설을 끝맺지 않는다. 라면조차 끓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밥 짓는 법을 알려주고, ‘남자는’과 ‘여자는’을 어두에 붙여 성별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광고 문구에는 언제든 떼어낼 수 있는 스티커를 조심히 붙여둔다. 자신과 타인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어느 누구도 섣불리 소외하지 않는 조경란의 글쓰기는 사려 깊고 다정하다.
쓰세요, 어떤 글이든. 그런데 시작도 전에 포기하게 되거나 시작해도 쉽지 않을 거예요. 힘들 때마다 그 책에 찬사를 해줄 사람을 떠올려보는 거예요. 한 사람은 있어요. 내 쪽의 그런 분명한 한 사람. 때론 그게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겠죠.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또 받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하다보면 뭔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 상상만으로도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 힘을 내서 살아야 할 때가 많으니까. _「분명한 한 사람」, 152쪽
어느덧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익숙하던 것들의 사라짐을 의미하고 종종 쓸쓸함을 동반하지만 필요한 변화이기도 하다. 이때 작가는 달라진 시대의 가치를 긍정하면서도, 행여 그것에 동의하지 못할 이들을 쉽게 내치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심한 마음 씀은 조경란의 『가정사정』 전체를 관통한다. _ 해설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김미정 평론가.
『가정 사정』의 단편들은 주로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슬픔 앞에 의연해질 나이라고 생각될 법하지만, 과연 나이를 먹고 경험이 거듭되면 어린 시절의 상처는 잊혀지고 자연히 성숙해지는 것일까. 김미정 평론가는 말한다. “‘슬픔’이라는 말에 함축된 약함, 아픔, 나이듦, 불안정함 같은 말들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거나 위축되게 하는 말들이 아니라 과연 ‘살아가는 이야기’에 값”하며, “더는 기피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과 다름없다”(해설)고 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오랜 상처에 무람없이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나아가 서로를 감싸 안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은 아닐지, 조경란은 여덟 편의 작품으로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