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사랑으로 남긴 마지막 이름
『아름다운 사람 하나』
“여성 해방의 전사”(장석주)이자 “여성들의 배후”(김정은) 고정희 시인의 마지막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가 문학동네포에지 49번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인은 1990년 말 들꽃세상에서 이 시집을 펴낸 후 이듬해 취재차 나선 산행에서 실족하여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자 시혼의 본거였던 지리산의 품에 안겼다. 32년 만의 복간임에 그의 31주기에 맞추어 펴낸다.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 시인은 이 시집을 두고 ‘연시집’이라 일렀다. 사랑을 향한 부름, 사랑이라는 연습, 사랑을 위한 조문…… 사랑으로 써내었거나 ‘사랑’ 그 자체인 시편들이 시집 속에 빼곡하다. 그가 떠난 후 출간된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를 제외하면 이 책이 그의 생전 마지막 시집이니, 그가 우리 곁에 마지막으로 남긴 이 여백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살아 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 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_「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부분
고정희는 “자신의 ‘이전과 이후’로 그 사회를 변화시켜 놓”았다(김승희) 할 1세대 여성주의 시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문학의 안과 밖으로 고루 손을 뻗으며 우리 시사의 초석이자 기둥으로서, 또한 여성운동사의 부름이자 물음으로서 생생히 살아 있는 이름일 테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는 들꽃세상에서 출간된 후 푸른숲(1992)에서 수록 시와 그 순서를 달리하여 재출간된 바 있다. 이후 2011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시인을 기억하고 그리는 친구들이 모여 다시 한번 그의 모든 작품을 『고정희 시전집』(또하나의문화)으로 묶어내었고, 이번 문학동네포에지는 이 전집의 순서를 따랐다. 문학동네포에지는 그의 30주기에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다시 엮은 바 있으니, 이로써 고정희 시인의 처음과 마지막을 한데 나란히 두는 일이다. 고정희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31년이 되었으나 잊힐 수 없고 잊혀선 안 되는 그 값짐, 비워둘 수 없으므로 여전한 기억의 자리에 이 시집을 다시 올린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 지는 하늘에 쓰네 _「하늘에 쓰네」 부분
생전 시인은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을 펴내며 “아무리 우리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 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히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 길에 등을 돌려서도 안 되며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라는 소회를 남겼다. ‘여성해방문학’의 선구자이자 최전선의 척후로서 시인을 이끌고 나아가게 한 힘은 결국 멈추지 않는 사랑, 고단할지라도 부단한 사랑이었으리라. 시인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품인 지리산으로 돌아갔으나 고정희라는 그 이름, ‘아름다운 사람 하나’ 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르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철철 샘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이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운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을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제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 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_「서시」 전문
■ 기획의 말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 시인의 말
이 시집,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 신뢰, 소망, 기쁨, 고통, 노여움, 그리고 사랑과 힘이 이 시집의 기록입니다.
시 편편 글자마다 나와 이 세계의 문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한 편도 눈물 없이 쓸 수 없었던 이 시편들, 그러나 사랑의 화두에 불과한 이 연시편이 모든 이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노래가 되기를, 그리고 내가 더 큰 사랑의 광야에 이르는 길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1990년 가을
고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