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등단 25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복복서가×김영하 소설’ 시리즈 2차분이 출간되었다.
북으로 귀환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의
24시간을 긴박하게 묘사한 『빛의 제국』은 냉전문학의 이념적 계보를 스파이스릴러라는 장르로 해체해버리고, 신념과 가치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에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묻는 문제작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판에는 없었던 작가의 말을 싣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세 개의 나라, 세 가지
실존: 사이보그, 부적응자,
불법이민자
스파이 김기영은 북한, 1980년대
남한, 21세기 남한이라는 “세 나라”를 겪은 예외적 소수자다. 북한에서 그는 ‘개인’이 아니었으며, 1980년대의
남한에서 그는 주사파 운동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평범한 중년 가장 김기영은 자신이 다만 불법이민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어쩌다보니 이곳에 정착하게
됐고, 잘 적응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래의 내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고. 아무렴 어떠냐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짜 스파이가 암약하고 있는 나라,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장기 휴전국의 중견 소설가가 그린 스파이 김기영은 어째서 이토록 무력하고 세속적인가. 권총도 비정함도 탄탄한 복근도 모두 잃어버린 타락한 간첩 김기영은 자본주의의 영광을 치장하지도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웅변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빛의 제국』이 도달한 남다른 핍진성이다. 허구적 상상력의 빈틈을 파고들어 현실을 정교하게 복원할 때, 독자는
지금껏 지각하지 못했던 냉엄한 실존의 조건에 새삼스러운 눈길을 던지게 된다.
운명에 대한 명상, 또는
내 삶의 주인 되기
김기영은 한번도 자기 삶의 주도권을 쥐어본 적이 없고, 자의로 무엇을 선택할 기회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같은 운동권 출신인
대학 동창과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장만하고, 영화수입업자로 무난히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깜빡 잊고 있던
운명이 그를 소환한다. 이 ‘부름’은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일상에 매몰된 삶’의 소중함을 부각시키고, 인간 존재의 항구적 불확정성을 폭로한다. 김기영의 갈등은 전형적인 현대인의 신경증, 자아 찾기를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동시에 몰개성과 익명성 속에서 편안하게 자아분열을 즐기는 현대인의 이중성과 일맥상통한다.
오랫동안 『빛의 제국』의 의의는 한국 현대 정치사와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설명되었다.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균형있게 포착해 힘있는 서사로 풀어냈다”는 만해문학상 수상작 선정 이유는 그러한 시각을 잘 압축하고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2017년, 프랑스에서
연극으로 상연된 『빛의 제국』을 리뷰하면서 《르몽드》지가 분단국가의 상징인 스파이 김기영을 가리켜 “삶의
연속성을 상실함으로써 파편화와 자기소외에 시달리는 분열적 존재”라고 했을 때, 마침내 『빛의 제국』은 역사와 현실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편의 소설로, 보편문학으로 읽히고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어느 누구도 자기 생에 대해서만은 정치적일 수 없고, 매일을 필사적으로 살고 있어도 자기로부터 분리된 채로는 생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빛의 제국』은 극단적 조건에 놓인 한 사람을 통해 평범한 하루하루의 유의미를 깊이 명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김영하의 소설들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묵직하고 성찰적인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