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신분 종교 성별의 제약에 맞서
무명 배우에서 전업 작가로서, 끝내는 예술적 성취를 이룬
엘리자베스 인치볼드의 대표작 국내 초역
18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 엘리자베스 인치볼드의 장편소설 『단순한 이야기』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9번으로 출간된다. 1980년대부터 연구되기 시작해 18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 작품으로, 해당 연구의 진전에 따른 변화에 발맞춰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단순한 이야기』는 여성의 욕망과 주체성이라는 대담한 주제를 우아하면서도 재치 있는 문체로 펼쳐낸 작품이다. 가톨릭 신부 도리포스를 축으로 전반부는 그의 아내가 되는 밀너 양의 이야기가, 후반부는 밀너 양의 딸 레이디 머틸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당시 출간되고 한 달 만에 중쇄를 찍을 만큼 높은 인기를 얻었고, 작품이 창작된 때로부터 200년이 흐른 뒤에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작은 걸작’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인치볼드는 1753년 영국 서퍽 지방에서 가톨릭 집안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18세기 말에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아니라 가톨릭을 믿는다는 것은 제도적·관례적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소수자의 입장에 놓이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인치볼드는 배우를 지망해 십대 후반 런던으로 떠나 극단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혀가 짧은 신체적 약점과 성희롱에 노출되기 쉬운 여배우의 처지로 두루 어려움을 겪게 되자 1772년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많은 가톨릭교도인 배우 조지프 인치볼드와 결혼해 그와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어렵사리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간다. 1779년 남편이 돌연사하나 이후 재혼을 선택하지 않고 소극(笑劇)을 집중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했고, 1784년 무대에 오른 첫 소극인 『무굴인 이야기』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후로 거의 매해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극작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며 1789년 무대에서는 은퇴해 당대의 입지전적인 인물, 즉 가톨릭교도 미망인 신분의 전업 작가, 자신의 생계를 독립적으로 이어나가는 여성 작가로, 다수의 희곡을 집필하고 당대 영국 극단에서 상연된 희곡을 집대성하며 두 편의 장편소설을 남긴다.
오늘날에 이르러 작가의 명성은 1791년 출간한 첫 소설인 『단순한 이야기』에 주로 기인한다. 1776년 엘리자베스 인치볼드는 당대 명배우인 세라 시든스 부인을 알게 되어 이후 45년간 우정을 이어가게 되고 부인의 동생이자 배우 존 필립 켐블과도 교유한다. 1777년 1월 극단에 합류하게 된 켐블을 만나, 그해 2월부터 그를 남자 주인공인 ‘도리포스/엘름우드 경’의 모델로 삼아 『단순한 이야기』의 전반부 집필을 시작한다. 수년이 흐른 1791년 2월에야 작품이 출간되는데, 이어 한 달 만에 중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하여 작품이 창작된 때로부터 200년가량 흐른 1980년대 후반, 영문학자 테리 캐슬이 『단순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소홀히 대접받은 작은 걸작”이라 평가한 것을 시작으로 연구가 이어지며, 18세기를 대표하는 주요 소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도덕적인 메시지와 순종적인 여성 인물들이 주를 이루던 18세기 중후반 영국 문학의 풍경에서 인치볼드가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구현해낸 문학 세계는 독특하고 매력적이며 무엇보다 전복적이다. 자신을 이끌어줄 남자와의 결혼에 안착하는 전형적인 여성 인물 대신, 기존의 남성적 권위에 도전할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또 금지된 사랑을 과감히 추구하는 당돌하고 재치 있는 여성 인물인 밀너 양이 전반부 서사를 이끌어간다. 개신교 기숙학교에서 교육받은 아름다운 밀너 양은 자신의 후견인이자 가톨릭 신부인 도리포스를 사랑하게 되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해낸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는 밀너 양의 딸인 레이디 머틸다가 전혀 새로운 서사를 이끌어가며 두 여성의 삶의 대조를 통해 연극적 재미와 사회 풍자적 요소가 두루 발현된다. 이렇듯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문체와 입체적인 인물 형상화, 함축적이고 재기 발랄한 대화와 예상 밖의 플롯 전개 등은 엘리자베스 인치볼드를 17세기 말의 아프라 벤부터 19세기 초의 제인 오스틴으로 이어지는 초기 영국 여성 소설가 계보에서 주요한 작가로 만든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여성 전업 작가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욕망을 과감히 다룬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여성 작가 삼인방 아프라 벤, 들라르비에르 맨리, 엘리자 헤이우드를 직접적으로 잇는다. 또한 복잡하고 매력적인 인물의 형상화와 섬세한 내면 묘사, 사회 풍자적 요소와 우아한 문체로 후대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작품(『맨스필드 파크』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직접 인치볼드의 희곡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한다)을 예견할 뿐만 아니라, 열정적이면서 문제적인 ‘엄마’와 온순하고 순치된 ‘딸’의 이야기가 무뚝뚝한 한 남자의 삶과 맞물려 이어진다는 점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의 친연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추천사
『단순한 이야기』를 세번째, 아니 어쩌면 네번째 읽는 중인데,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제 마음을 사로잡네요. 이런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어요. 이토록 강렬하게 감정을 뒤흔들고, 소설 속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다니! _마리아 에지워스가 엘리자베스 인치볼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단순한 이야기』는 많은 장점을 지닌다.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정확하게 묘사되고 그 묘사는 충실히 유지된다. 극히 섬세한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며, 사건들은 자연스럽다. 지금의 소설 작법들과 비교해볼 때 더욱 특별한 점은 이 사건들이 새롭다는 것이다. _『크리티컬 리뷰』(1791년 2월호)
안목 있는 독자들에게 인치볼드 부인이 쓴 소설의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건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는 최고의 비평가들로부터 확고한 인정을 받았으며, 인물과 상황을 그려내는 데 있어 비슷한 작품들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닌다. _애나 바볼드 (『영국의 소설가들(1810)』 편집자 서문 중에서)
엘리자베스 인치볼드의 역작이다. 너무 오래 소홀히 대접받은 작은 걸작. 부러 과장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 문학에서 가장 우아한 작품에 속할 것이다. _테리 캐슬(영문학자)
『단순한 이야기』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소설이라는 장르적 외피 아래, 인치볼드는 당대 영국의 정치적 풍조에 깃든 깊은 긴장을 풀어냈다. _케일리 크레이머(영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