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삶보다 사랑은 더 어려운가”
어느 오래된 영혼이 머물다 간 시간,
우리에게 남은 것이 이토록 많다.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신형철), 그로써 단연 “시인 같은 시인”(서영채). 2018년 우리 곁을 떠나 ‘혼자서 무한으로 걸어간’ 시인(허연). 허수경의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문학동네포에지 45번으로 다시 펴낸다. 2001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니 21년 만이다.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후 한국에서 두 권의 시집을 내고 홀연 독일로 떠나, 긴 방황과 외로움, “섬처럼 떠돌아다니던 시간”을 지나며 써낸 글들이다. “이제 더이상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하지 않는 지혜”로, “내가 나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살아갈 것”(시인의 말)이라는 다짐으로 엮은 단단한 책이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_「바다가」 부분
시인은 1964년 오래된 도시 진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1992년 늦가을 독일로 가 더 오래된 도시, 폐허가 된 옛 도시들을 발굴하며 살았다. 그곳에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사무치게 알았다”. 이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는 그가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공부하고, 발굴하고,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을 살아내며 8년에 걸쳐 묶은 시집이다.
뿌리를 뽑고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서 자라나는 뿌리마저
제 손으로 자르며 날아가는 나무도
별 달을 거쳐 수직도 수평도 아닌 채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 집을 이루고
또 금방,
집 아닌 줄 알고 날아가리라 _「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전문
한국을 떠나 독일로, 발굴을 위해 시리아와 터키를 오가며 시인은 “몸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으로” 다양한 세계를 만났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도시와 되살아나는 역사 사이에서 시인은 태어남과 죽음을, 광막함과 외로움을 본다. 선연한 것은 전쟁과 폭력이 남긴 핏자국이다. 전쟁을 피해 왔다는 전철 속 가수의 입안으로 여전히 탱크가 지나가고(「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 국경을 지나는 사람들 앞에 “탱크는 길을 파고 비행기는 길을 막는다”. 사람들이 제 목을 자르며 들어간 차가운 땅속(「늙은 새는 날아간다」), 시인이자 고고학자였던 그가 발굴한 것은 폭력의 유구함이자 문명의 한계, 유한성에 대한 예감이기도 하다.
머리가 둘 달린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나
성안 마을을 돌아다니고
머리는 하나이고 몸을 둘인 아이들은 술청에 앉아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검은 군인들이 일으킨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둘인 몸은 서로를 껴안고 하나뿐인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오 오 어느 날
가버린 사람들은 별이 되었을까, 오래된 노래는
성안 마을 시궁을 흐르고 시궁에서는 먹가슴 같은 물이 흘러
노을은 지나다가 가끔 멈추어 서서 피곤한 얼굴을 씻는데 _「붉은 노래」 부분
낯선 땅에서 시인은 썼다. 쐐기문자부터 라틴어, 고대 중국어, 수메르어 등 잊혀가는 여러 말들을 익히고 읽고 되새기면서도, 오직 ‘한국어라는 바다에만 머물며’ 시를 썼다. 닿지 않으리라는 불안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쌓아올린 외로움의 집에서 시인은 시인 자신을 썼다.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어느 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어느 날 애인들은」),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을 알면서(「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시인은 멈추지 않고 썼다. 편지가 든 가방만 과수원 나무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어느 날 거기서 “오래된 문자로 쓰인 편지가 지상으로 떨어”질 것임을, “누군가 공장의 그늘 아래에 멈추어 서서 늙은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읽”을 것임을(「그 옛날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믿었다. 고독과 절망 속으로 들어가되 기어이 맨눈으로 버티어서 보았고,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말들을 붙잡아 썼다.
그날의 일기 속에는 불안 같은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 너의 품을 빠져나온 오랫동안 잠을 잔 혀는 아이들의 머리에 매달린 흰 꽃에 입을 맞추고 흐르는 불처럼 창밖 너머 펼쳐진 숲을 건넌다 오 오,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너의 품속에서 새로운 생을 끄집어내듯 나는 아프다 오 오 새로운 지문의 날들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때 너는 일기를 다시 쓰고 일기장 속에서 오래된 시간은 잠든다 오래된 시간은 얼마나 고요히 우리를 예언했던가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이 순한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것을 오래된 시간은 얼마나 고요히 예언하고 있었던가 _「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전문
투병중이던 2018년, 개정판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난다)를 위한 자신의 약력을 정리하며 그는 이런 말을 둔다.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시인이 남긴 여섯 권의 시집 중 한 편이다. 생전 그는 세 권의 산문집, 세 편의 장편소설, 두 권의 동화책을 펴냈고, 2018년 10월 3일 우리 곁을 떠나며 세 편의 유고집을 남겼다. 어느 오래된 영혼이 머물다 간 시간, 우리에게 남은 것이 이토록 많다.
왜 사람들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편지를 쓰는가
왜 삶보다 사랑은 더 어려운가
왜 저 배우는 유럽의 어느 지하도, 더러운 하수장에서 죽어가면서도
하수도를 따라 떠내려가는 편지를 잡으려고 하는가
_「내 마을 저자에는 주단집, 포목집, 바느질집이 있고」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