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 이시구로,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증명하는 신인 작가
떠돌고 맴도는 존재들에게 깃드는 환상 같은 순간에 대한 아름다운 데뷔작
나오미 이시구로는 이십대에 영국 바스의 한 서점에서 서적판매원 및 독서요법치료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책을 통해 사고와 감정의 폭을 넓히고 고통을 이겨내는 손님들과 교감하며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의 데뷔작인 단편소설집 『탈출로』는 이 시기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는데, 익숙한 삶의 풍경들에 비범한 상상을 덧칠해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아홉 편의 이야기를 묶은 것이다.ㅁ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의 부친이다. 나오미 이시구로는 가족이 일상적으로 서로의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환경에서 자랐고, 성장기에 쓴 습작들에는 부모의 냉철한 의견이 쏟아지기도 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딸이라는 이름이 어쩌면 양날의 검과도 같겠지만 『탈출로』의 아홉 작품은 나오미 이시구로가 자신의 이름만으로 우뚝 서기에 충분한, 아니 그 이상의 재능을 가진 작가임을 증명한다.
탈출을 갈망하는 이들의 정체된 일상, 그 속에서 요동치는 내면
「심장마비」 「곰」 「마법사들」
『탈출로』의 등장인물들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탈출, 구원, 새로운 전환을 꿈꾸지만, 막상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요동치는 마음을 품은 채 괴로워한다. 「심장마비」는 대도시 런던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아일랜드 바닷가의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런던을 떠나려고 여행가방을 싸고 푸는 일을 매일 반복하지만 정작 공항까지 나서지 못하고, 그저 시가지를 배회하며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이상상태 때문에 아프고 혼란스러워한다. 「곰」은 아내가 원해서 집에 들인 거대한 곰인형을 두고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남편의 이야기를 그렸다.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컸지만 한낱 봉제인형일 뿐인 그것이 이상하고도 절묘하게 부부의 일상에서 존재감을 키워나가자 남편은 어째선지 옹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거듭하다 아내와 자신들의 부부생활에 대한 작은 진실을 깨닫게 된다. 「마법사들」은 자기 몫을 훌륭히 해내는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듯 보이는 성인 남자와, 자식을 극도로 과잉보호하면서도 자식에게 상처 주는 말 또한 서슴지 않는 부모로부터 얼른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는 남자아이의 운명 같은 조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럼에도 돌연 마법처럼 열리는 구원의 순간들에 대하여
「쥐잡이꾼 Ⅰ․Ⅱ․Ⅲ」 「양털 깎는 계절」 「속도를 높여!」 「납작지붕」
『탈출로』에서 특히 눈여겨볼 작품이 있다면 「쥐잡이꾼」 연작이다. 총 3부짜리 작품이 다른 작품들에 섞여 띄엄띄엄 배치되어 또다른 읽는 재미를 준다. 『탈출로』의 수록작 대부분이 현실과 일상에 마법적 색채가 가미된 이야기라면, 「쥐잡이꾼」 연작은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동화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쥐가 들끓는 도시에서 실력가로 소문난 쥐잡이꾼이 국왕의 부름을 받고 왕궁의 쥐떼 소탕에 나섰다가 극악한 진실을 마주한다. 「양털 깎는 계절」은 대자연의 섭리와 계절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양떼 목장에서 자라왔지만 나중에 커서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은 소년이 자신의 꿈을 이뤄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하숙인을 만나 경험하는 신비롭고 충격적인 이야기다. 「속도를 높여!」는 회사 일에 집중하지 못하던 한 인물이 과거에는 싫어했던 커피의 맛을 새로 알게 되면서 슈퍼파워를 얻고 그야말로 폭주하게 되는 날들을 그렸다. 「납작지붕」은 어떤 상처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인물이 매일 납작지붕에 올라 시간을 보내다가 지붕을 찾는 새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받는다는 가슴 먹먹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