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프랑스의 문제적 작가이자, 사회·역사·문학과 개인의 관계를 예리한 감각으로 관찰하며 가공도 은유도 없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해온 아니 에르노. 2011년 선집 『삶을 쓰다』가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최근 들어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문학동네에서는 『삶을 쓰다』에 실렸던 글들을 추려 재수록한 『카사노바 호텔』 출간과 함께, 대표작 『탐닉』과 『집착』의 개정판을 새로운 표지로 단장해 선보인다.
『탐닉』은 아니 에르노가 1991년 발표한 소설 『단순한 열정』의 모티프가 된 일기를 모은 책이다. 르노도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이자 대학교수였던 아니 에르노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나눈 불륜 체험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단순한 열정』을 발표했을 때, 프랑스 평단과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이 책은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국내에도 소개되어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널리 회자되는 등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그리고 십 년 뒤인 2001년,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에서 이야기한 사랑과 기다림의 시간을 날것 상태로 생생히 기록한 일기문을 『탐닉』(원제: Se perdre, 길을 잃다라는 뜻)이라는 책으로 묶어 발표했다. 이 책에는 강렬한 열정과 그것에 유착된 순수함, 아름다움 같은 초월적 가치가 담겨 있으며, 그녀가 기록한 사랑의 자잘한 디테일들은 평범한 일상을 문학의 자리로 승화시킨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탐닉』은 직접 체험한 것만을 글로 쓸 것이라는 작가의 선언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허구는 없다. 그녀는 S와 만나서 헤어지기까지의 기간인 1988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의 일기를 공개한다. “S…… 이 모든 아름다움”으로 시작되어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으로 끝나는 그녀의 일기는 S와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녀가 살고 싶어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일기를 쓸 당시 에르노는 마흔여덟 살의 이름난 작가였으며, S는 서른다섯 살의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이었다. 그녀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그와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그가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연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녀와 사랑을 나눈 S는 근사한 외모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출세지향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는 에르노의 작가적 명성에 열광하고, 그녀 또한 명예욕에 가득찬 애인을 위해 대통령과의 만찬과 같은 행사에 기꺼이 참석한다.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몸치장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소련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영화 시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애인의 아내와 나란히 앉아 있기도 한다. 에르노는 애인의 아내와 자신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주부와 창녀”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일상적 공간에서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기도 하고(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먼저 걸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동화처럼 살고 싶”은 그녀의 환상이 반영된 표현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을 열정으로 살고 싶은 그녀의 노력은 자잘한 것들에까지 미친다. 그녀는 “신으로 군림하는 그”를 위해 옷, 음식,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성과 열의를 다한다. 그럼에도 열정의 시간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연하의 애인이 바람을 피울까 조바심을 내고, 그를 소유하고 있는 그의 아내에게 불같은 질투심을 느낀다.
사랑, 그 절절한 고통과 뜨거운 열정
에르노의 일기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절절한 고통과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글을 씀으로써 그와의 시간이 아로새겨진 몸의 기억을 박제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혹은 삶에 가까운 무엇을 허무에서 구”해내고, 자기 자신을 지탱하고 구원한다. 그녀가 사랑을 위해 바친 열정에 대한 기록은 일상을 문학의 자리로 승화시킨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을 위해 순간순간을 열정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고 십 년이 지난 후 일기장을 공개했을까? 단지 『단순한 열정』의 논픽션 판이라면 『탐닉』이 가지는 의미는 그녀의 노출벽이나 만용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페이지들 속에 『단순한 열정』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진실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이. (……) 순간순간 종이 위에 나열해놓은 단어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 단어들은 시간 그 자체다.”
▶ 본문에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다. 나에 대한 그의 욕망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확신이었다. 모든 의미에서 그는 어둠 속의 애인이었다. 10~11쪽
나는 일종의 내적 필요에 의해 이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S가 느낄 감정에 개의치 않고. 당연히 그는 문학적 권력의 남용이라거나, 더 나아가 배신이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 몇 달 동안 그가 자신도 모르게 나의 경이롭고도 무서운 욕망과 죽음, 그리고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13쪽
눈을 뜨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후에’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그가 벨을 누르고 들어오는 순간에 정지한다는 말이다. 그가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끝없는 불안감 때문에 이 이야기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가 내게 어떤 식의 애착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감각적으로’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명확한 방법일 것이다. 52쪽
1주일 전에 나는 그가 나를 원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났을 수도 있다. 이 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과 고통의 외침이 될 것이다. 125쪽
일기장을 다시 읽지 말아야겠다. 끔찍하다. 글로 쓰인 이 고통과 기다림은 언제나 희망이며 인생 자체였다. (이 부분에서 울음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통마저 가능하지 않다. 내 앞에는 공허만 있을 뿐. 형언할 수 없는 공포 아니면 공허감,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해야 하나! 294쪽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 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 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15쪽
▶ 언론평
『단순한 열정』을 잉태한 생생한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리르
살아 있는, 속임수 없는, 감히 말하자면 문학적이지 않은 책. 꾸미지 않은 진실이 발가벗고 서 있다. 마치 잔인무도한 아침햇살 아래 드러난 맨얼굴처럼. 렉스프레스
아니 에르노는 그 익숙한 열정의 의식과 기다림, 그리고 그녀가 상실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의 달콤한 고문을 일깨워준다. 이코노미스트
에르노는 자신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충족시키고, 고통스럽게 한 그 무엇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는 변신의 글쓰기가 되고, 이 책을 단순한 개인사의 기록 이상이 되게 한다. 뤼마니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