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인 소설가 외에도 사시사철 음악과 함께하는 애호가, 눈에 들어온 것은 저도 모르게 모아버리고 마는 수집가로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소장중인 1만 5천여 장의 아날로그 레코드 중 486장의 클래식 레코드를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100여 곡의 명곡에 얽힌 사사로운 에피소드를 따라가다보면 클래식 애호가든 아니든 어느새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하루키 매직을 만나게 된다.
작가도 수집가도 아닌 취미생활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60년간 습관처럼 모아버린 특별하고 개인적인 컬렉션
고등학교 시절부터 클래식을 애청하며 창작의 원천이자 오랜 취미생활로 삼아온 작가는 “레코드를 모으는 것이 취미라서 이럭저럭 육십 년 가까이 부지런히 레코드가게를 들락거리고 있다”라고 밝히며 이 책을 시작한다. 최근 들어 컬렉터를 대상으로 발매되는 화려하고 다양한 사양의 LP와 다르게 대부분 “1950년부터 1960년대 중반에 녹음된 새카만 바이닐 디스크”이며, 별다른 체계와 목적 없이 눈에 띄는 대로 사모은 탓에 “통일성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중구난방의 컬렉션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틈날 때마다 한 장 한 장 정성껏 손질하며 턴테이블에 올리고, 지휘자와 연주자뿐 아니라 음반사, 녹음연도에 따라서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연주의 결에 귀기울이는 모습에서는 클래식 팬으로서의 진지한 애정이 가득 묻어난다. “오래된 먼지투성이 레코드를 싼값에 데려와 최대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내게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라며 아날로그 레코드의 물성을 예찬하는 작가의 태도는 분야를 막론하고 무언가에 애착을 가지고 수집해본 사람들, 나아가 독자 입장에서 그의 소설을 오랫동안 애독해온 사람들에게 색다른 공감대를 형성한다.
하루키 문학의 열쇠가 되는 클래식 레코드
그간 소설에서 접해온 ‘하루키 월드’의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
책에서는 차이콥스키,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바흐 등 익히 잘 알려진 작곡가들의 교향곡과 협주곡에서 로시니와 비제의 오페라, 들리브의 무용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아우른다. 더불어 비첨, 오그던, 마르케비치, 오자와 등 작가가 특별히 즐겨 듣는 거장 지휘자들의 음반은 따로 모아 언급하면서 총 100곡이 넘는 클래식 명곡을 다룬다. 대외적인 평가보다는 개인적인 취향과 ‘어쩌다보니 모여버린’ 목록을 우선한 방대한 이 리스트에서 그간 소설에서 접해온 ‘하루키 월드’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다. 『태엽 감는 새』의 첫 장을 여는 로시니 오페라 <도둑까치> 서곡, 『일인칭 단수』에서 인상적인 단편소설로 탄생한 슈만의 <사육제> 등 소설 제목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던 곡이 먼저 눈길을 끌고, 『해변의 카프카』의 베토벤 피아노삼중주 <대공>, 『노르웨이의 숲』의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등 그간의 대표작에서 인물 심리와 취향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 곡들도 언급된다. 하차투랸의 바이올린협주곡을 들으면서는 스스로 팬이라고 여러 번 밝힌 레이먼드 챈들러의 장편소설 『기나긴 이별』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오직 취향과 우연으로 골라낸,
경이롭고 감탄할 하루키만의 플레이리스트
세계적인 작가이니 음악 감상법에도 자기만의 고집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코드를 사고 듣는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순하다. 세일품 상자를 뒤지다가 그저 재킷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집어들기도 하고,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사버리기도 한다. 어떤 레코드는 틀기만 하면 잠이 들어버리는 탓에 낮잠의 배경음악으로 애용한다고 밝힌다. 그만큼 일상생활에 녹아든 취미로서 자유롭게 향유하는 한편, 치열한 음악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재능을 소모하고 사라져간 음악가의 흔적을 겸허하게 바라보고, 거장의 젊은 시절 발자취를 담담하게 더듬어간다. 단순한 취미생활 에세이를 넘어 일가를 이룬 작가로서 다른 분야의 예술을 탐닉하고 또 경외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보물 같은 책이다.
● 추천글
이 책은 하루키의 어떤 신작 소설 이상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읽는 내내 신나는 경험이었으며, 앞으로 어떤 음악을 듣거나 떠올릴 때마다 두고두고 다시 꺼내보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클래식에 대한 작가의 넓고 깊은 편력은 놀라움과 존경심마저 안겨주며, 특유의 문체는 ‘즐거운 책읽기’의 새로운 장르를 선물해준다. _박종호(클래식 음반매장 풍월당 대표)
누군가의 애정 어린 수집품을 구경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인데, 하물며 그것이 하루키의 빈티지 클래식 음반이라니. 그것도 실물 LP판이라니. 하루키가 조심스럽지만 확고한 태도로 자신의 음반 세계를 소개하는 덕에 읽다보면 홀린 것처럼 그 음반들을 하나하나 찾아 듣게 된다. 클래식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입문을 위한 가이드로, 클래식 애호가라면 하루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만하다. _김겨울(작가,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 운영자)
● 본문에서
오래된 LP판에는 LP판만의 아우라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그 아우라가, 마치 소박한 온천에 몸을 담근 것처럼 내 마음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덥혀준다. (……) 마음에 드는 레코드 재킷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안에 있는 음악의 세계에, 또다른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물건의 형태에 너무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돼버렸으니 별수없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거의 의미 없는 편향의 집적에 지나지 않으니까. _「왜 아날로그 레코드인가」, 12~13쪽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에, 사립탐정 필립 말로가 새벽 세시 집에서 이 바이올린협주곡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하차투랸은 이걸 바이올린협주곡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내 귀에는 트랙터 공장의 늘어진 팬벨트 소리 같기만 했다”라는 것이 그의 감상(의 요약)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짜증이 난 상태였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말로 씨는 이 곡에 대해 썩 좋은 인상을 품지 못한 것 같다. _「하차투랸 바이올린협주곡 D단조」, 35쪽
이 빈 팔중주단 멤버의 재킷 속 베토벤의 얼굴은 꽤나 까다로워 보인다. 왠지 모르게 눈빛이 형형하다. 정말로 눈을 형형히 빛내면서 이런 곡을 슥슥 써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천재가 어떤지 나는 잘 모르니까. 그래도 분명 모차르트는 이렇게 무서운 얼굴은 하지 않았겠지. 친근하게 다가가는 곡이라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베토벤 스스로는 그 점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건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야’ 하듯이. 마치 어쩌다 자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린 본격문학 작가 같다. _「베토벤 칠중주 E♭장조 작품번호 20」, 86쪽
‘20세기의 삼대 비극은 히틀러와 원폭과 현대음악이다’라고 호언한 사람이 있는데(누구였더라?) ‘과연’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버르토크 현악사중주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음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_「버르토크 현악사중주 4번」, 89쪽
젊은 시절 처음 말러 교향곡을 듣고 ‘이렇게 뭐가 뭔지 모를 기묘한 음악을 대체 누가 좋아서 듣는담?’ 하고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난다. 소리의 흐름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유의 음악이었으니까. 그러나 듣다보니 완전히 그 소리에 물들어버려서, 지금은 열심히 귀기울이게 되었다. 신기한 일이죠. 시대는 변한다. 감각도 변한다. _「말러 교향곡 1번 D장조」, 129쪽
고백하자면 내가 제일 자주 들은 음반은 요요마가 참여한 클리블랜드SQ의 CD인데, 왜인가 하니 늘 이걸 들으면서 소파에서 낮잠을 잤기 때문이다. 절대 따분한 연주는 아닌데 듣다보면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져서 새근새근 곤하게 잠들어버린다. 다른 연주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법 애용했다. 괜찮으면 한번 시험해보시길. _「슈베르트 현악오중주 C장조 D.956」, 251쪽
내 꿈은 실력 있는 현악사중주단을 개인적으로 고용해서 이 K.421의 연주를 눈앞에서 듣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느냐면, 옛날(고등학생 시절) 텔레비전 드라마 <배트맨>에서 주인공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정장을 입은 현악사중주단이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멋있다’고 감탄하면서, 나도 나중에 부자가 되면 꼭 저렇게 해봐야지 생각했다. 아쉽게도 아직 그 정도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_「모차르트 현악사중주 15번 D단조 K.421」, 317쪽
바크하우스의 구 녹음 모노럴반은 다카다노바바의 중고가게에서 무려 50엔에 샀다. 띠지에 붙은 ‘50엔’이라는 가격표를 볼 때마다 ‘죄송해서 어쩌나’ 하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연주지만 뭐, 시장의 수급관계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흠잡을 데라고는 없는 연주다. ‘베토벤이란 이런 것이지’라고 바크하우스 선생께서 말씀하신다면 ‘네, 지당하십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50엔은 충격인걸…… _「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C단조 작품번호 111」, 338쪽
보스턴 교향악단 음악감독이 되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음악은 보다 충실해지고 스케일이 커지고 깊이를 더해갔지만,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당연히 책임도 무거워진다.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관리자로서의 의무도 늘어난다. 높은 곳에 오를수록 바람은 거세지는 법이다. 그에 비해 젊은 날의 세이지 씨는 실로 마음 편한 처지였다.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잡고, 그 파도에 올라타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시기 그의 연주는 그런 자유로움과 그곳에서 솟구쳐나오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하다. _「젊은 날의 오자와 세이지」, 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