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으로서의 자아,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적이다
스토는 먼저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는 오래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존 프리드모어를 만난다. 존은 부모의 이혼 이후 교도소에 드나들면서 무자비한 조직 폭력배로 활동한 인물이다. 존은 조직을 위해 일하며 자신이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고, 그렇게 형성된 부족적 자아는 그를 조종했다. 그가 집단 내에서 원하는 것은 오직 명성이었다. 존은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지만 밖에서는 집단적 자아에 이끌려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무자비하게 팼다.
존의 이야기는 인류가 부족 내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살았던 아주 오래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을 이루어 살던 원시 수렵 채집 시대부터 부족 내에는 서열 다툼과 지위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 부족생활에서 규칙을 어긴 사람은 내부인들에 의해 강력한 도덕적 분개심을 일으켰을 것이고 이는 가혹한 처벌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 부족생활은 그 모습이 바뀌었을 뿐,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소문은 온라인 미디어에 의해 빠르게 퍼져 나가고, 도덕적 분노와 수치심을 유발하며 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는 형태를 띤다. 이를 통해 실수를 배운 요즘 아이들은 실수를 매우 두려워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완벽주의라는 현대적 감정의 가장 깊은 원인은 고대 부족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구적 자아와 공자의 유교적 자아의 비교를 통해, 동서양 자아의 차이를 다루는 연구는 흥미롭다. 서양은 개인주의적인 데 반해, 유교 문화권인 동양은 집단을 중시하며 개인보다 ‘조화’를 추구하고 나무를 보기보다 숲 전체를 본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 남편이 아내와 자녀들을 먼저 죽이고 자살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이유다.
높은 자존감의 이면을 살피다, 에설런 연구소와 에인 랜드
서양, 특히 미국의 자아는 개인의 힘을 매우 강조했다. 자아는 영웅의 모습을 타고났다고 하며 영웅주의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패자로 분류했다. 1980~1990년대에 미국 사회에서는 자존감 열풍이 일었다. 높은 자존감에 대한 강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십대 시절을 보낸 저자 역시 낮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평생 노력하며 살았다. 저자는 ‘높은 자존감’의 숨겨진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캘리포니아 해안에 위치한 에설런 연구소Esalen Institute로 향한다. 에설런 연구소 만남집단 프로그램에 실제로 참여하는 동시에, 1960년대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에설런 연구소를 파헤친다.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으로 알려진 에설런의 프로그램은, 일종의 집단 요법을 이용한 정신 수양 운동으로 상호작용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렇듯 자존감과 자기애를 강조해온 에설런 연구소의 자존감 열풍이 사회에서 주류로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1992년 미국인의 89퍼센트가 자존감을 성공적인 삶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으며, 미국과 영국의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높은 자존감을 주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저자는 자존감 열풍이 일부 정치인과 한 단체가 주도해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사기와 허황이며, ‘자존감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그 근거를 낱낱이 살핀다. 이때 미국 작가 에인 랜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녀의 제자이자 한때 애인이었던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등이 그들이다. “자존감 열풍은 에설런 연구소와 에인 랜드,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상을 황홀하게 융합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높은 자존감이 무조건 좋다고 믿어온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대중은 얼마나 쉽게 오도되고 이 오도된 생각은 여과없이 얼마나 단단히 사회에 자리잡게 되는가?’
셀피 세대의 부상과 완벽에 대한 강박
다음으로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이자 셀피 중독자 CJ를 만난다. 그녀는 수십만 장의 셀카를 위해 저장공간 이용료를 내고, 새벽 4시까지 사진을 보정한다. 실생활보다 소셜미디어에서 비춰지는 모습에 더 신경 쓰고 화장할 때도 거울이 아닌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CJ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이며, 실제로 NPI(나르시시즘 성격지표) 검사 결과 40점 만점에 35점이라는 높은 점수가 나왔다.
이들이 셀카를 찍는 심리는 무엇일까? 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동안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서만 매일 930억 장의 셀카가 촬영되었다고 한다. 2021년 현재 그 숫자는 줄지 않고 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많은 데이터는 자존감 열풍의 시대를 지나면서 나르시시즘이 대단히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자존감 열풍 세대의 자녀들로,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거치며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들은 특별하고 훌륭하다고 말해온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문화로부터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셀카용 카메라다. 자신의 모습을 찍고 댓글과 좋아요를 받기 위해 사진을 온라인에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려준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인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들은 주기적으로 그러한 확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피드백이 끊기면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문제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젊은 층을 늘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디지털 플랫폼에서의 좋아요와 피드백, 집단 내에서의 인정을 위해서 경쟁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이 게임의 승자들은 엄청나게 부유한 유명인사가 될 수 있는 반면, 패자들은 종종 집단으로부터 거부당하며 때로는 개인에게 끔찍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소셜미디어의 잦은 이용이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완벽함에 압박을 느끼는 것이 일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약물, 폭음, 흡연, 청소년기의 성관계 같은 위험한 행동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높다. 그들은 운동을 많이 하고 더 건강한 식단을 즐긴다. 하지만 완벽주의 시대와 이를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부분적으로 그러한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 있다는 추측은 꽤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을 성공을 위한 더 나은 엔진으로 만들고 게임의 승자가 되게 할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완벽주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결국 이 책이 이야기하는 바는 의외로 단순하다. 낮은 자존감이든 높은 신경증이든,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격 특성 중 하나일 뿐이며 내 자아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 그 자아가 바로 나 자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완벽주의 시대에서 제시하는 이상적 자아 모델이 사람들과 수월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출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의 모습인 것은 사실이다. 고조된 개인주의, 금융위기, 불평등, 임시 노동, 비현실적인 신체 이미지, 소셜미디어……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이며 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문화는 은밀하게 자아에 침투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가족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성, 계급, 인종과 같은 ‘사회적 범주’로부터 온다. 문화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규칙을 내면화하고 그 규칙들이 우주의 법칙이라도 되는 양 충실히 지키기 시작한다. 내 배가 ‘이상적인 몸매’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느낄 때, 이는 내가 속해 있는 문화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흡수했고 문화는 내가 이상적인 모습과 멀어졌을 때 나를 꾸짖으며 지배하기도 한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자연스럽게 상당 부분 그 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문화의 요구에 완전히 귀를 닫아버릴 수는 없다. 당연하게도 누구나 내가 친구가 더 많았으면, 더 부자였으면, 더 말랐으면, 더 매력적이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수용은 ‘이것이 진짜 나다, 이를 받아들여라’와는 조금 다른, 가끔은 스스로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 보완하며 때로 타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고자 하는 나를 공격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이 환상임을 아는 것만으로 깊은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일 뿐이다.
자살이란 참 불가사의한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사실과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다. 목표가 좋든 나쁘든, 우리는 계속해서 목표를 밀어붙여 대도시를 건설하고 거대한 광산을 파고, 위대한 제국을 세우고 기후와 환경을 파괴하고, 과거 속 환상의 한계를 파괴하며 우주의 힘을 정복하고는 마법과도 같은 일을 우리 일상 속으로 들여온다. 어떤 것을 원하면 반드시 그것을 얻어내고야 만다. 우리는 탐욕스럽고 야심차며 영리하고 끈질기다. 자기 파괴는 이 도식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17~18쪽)
“저는 소셜미디어가 대중적으로 아주 인기 있는 시대에 자라났어요. 메신저에 몇 명의 친구가 있는지로 잘나가는지 아닌지가 결정되곤 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페이스북이 인기 있어졌고, 이는 고역이었어요. 거기에 올라오는 게시물들을 보는 일이 힘들었거든요.” 그녀는 말했다.
“뭐가 힘들었는데요?” 내가 물었다.
“그냥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것이요. 뭐랄까, 노골적인 사진들이었어요. ‘오, 난 내 인생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은데 난 그러지 못해서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저도 그렇게 보이고자 그런 게시물을 올렸어요.” (32~33쪽)
인간 자아의 가장 핵심적인 활동은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절실하고 과민한 자기 홍보 전문가다. 자신의 명성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아는 고통, 분노, 절망의 상태로 접어든다. 심하면 자신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53쪽)
나에게 자존감은 이야기가 개인적인 것이 되는 지점이다. 사회학자 존 휴잇 교수의 한 책에서, 나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임무에 나서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맹목적으로 실연하는, 즉 고전적이지만 어리석은 가상의 영웅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읽었다. (259쪽)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완벽함을 위한 전쟁을 막는 것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일단 스스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면,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평가를 내려볼 수 있다. (4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