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속한 차원의 세상이 멈춰버렸다.”
십대들의 사랑이 그려내는 새로운 파문과
깃털처럼 쏟아지는 환희의 순간들
한국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이 벌어지던 2002년의 여름날, 남들과 다른 정체성을 자각하며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와 텅 빈 독서실에 혼자 앉아 있던 ‘나’에게 거짓말처럼 누군가가 나타난다. “새하얀 얼굴과 구레나룻 없는 깔끔한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색 민소매 티를 입은”(41쪽), 모두가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기원하는 그 순간 한가롭게 <중경삼림>을 보는 남자, 윤도. 그런 윤도를 힐끗거리던 ‘나’에게 윤도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같은 학교일 뿐 아니라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떠들썩한 바깥의 소음과 단절된 채 오로지 눈앞에 서로만이 존재하는 순간. ‘나’와 윤도의 인상적인 첫 만남은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는 이를 설레게 한다. ‘나’는 여름내 윤도와 함께 수영장과 오락실 노래방을 오가고, 둘만의 아지트인 컨테이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모범생의 가면”(25쪽)을 쓰고 살아가느라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는 ‘나’는 점점 더 윤도에게 강하게 사로잡히고, 윤도는 그런 ‘나’를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면서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말들을 속삭여준다.
“너는 살면서 제일 두려운 게 뭐야?”
나는 매일 밤 침대에 누울 때마다 천장의 네 귀퉁이에 서린 그림자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에 사로잡히곤 한다고, 얼마나 많은 밤 동안 이 천장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할지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이 막막해진다고 말했다.
“그럼, 우리 1차원의 세계에 머무르자.”
네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너와 나라는 점, 그 두 개의 점을 견고하게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말이야.”
(130쪽)
“운명의 붉은 실”(121쪽)처럼 윤도에게 얽혀들수록 ‘나’는 마음의 평정이 무너져내리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윤도는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걸까? 윤도의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윤도와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
그 시절, 우리를 구원한 것들
‘나’는 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한편으로 같은 학원에 다니는 무늬라는 여자애와도 가까워진다. 밸런타인데이에 윤도에게 몰래 초콜릿을 선물하다 무늬에게 목격당해 약점을 잡힌 일이 계기가 되었지만, 귓바퀴에 “연습장 스프링처럼 잔뜩”(21쪽) 피어싱을 한 채 담배를 피우는 무늬는 남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지도 않는다. 대신 무늬는 자기만의 좁은 방에 갇혀 있던 ‘나’를 이끌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낯선 장소와 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야자와 아이의 『나나』와 『내 남자친구 이야기』,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원수연의 『Let 다이』, 라가와 마리모의 『뉴욕 뉴욕』 같은 만화들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나미에 언니’와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나’는 무늬가 열어준 세계에서 색다른 해방감을 맛보고, 무늬의 사연에 공감하며 모종의 연대감을 쌓아간다.
이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서사라고는 남자아이들이 반에서 돌려보는 『더 파이팅』이나 『힙합』 『짱』 『H2』 같은 만화가 전부였다. 모험과 경쟁, 짠내 나는 우정과 죽음으로 점철된 세계. 그런데 무늬가 건네준 『호텔 아프리카』는 달랐다. 소도시인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예술을 하는 남자,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상실을 안은 채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호텔 아프리카』를 읽는 내내 내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하지만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던 갈증이 해소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나는 『Let 다이』와 『뉴욕 뉴욕』을 읽으며 남성들의 사랑을 배웠고, 『별빛 속에』와 『노말 시티』에서 SF를, 『X』와 『성전』 『악마의 신부』에서 오컬트 문화를 흡수했다. 세상에 나를 위한 서사가 이토록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54~55쪽)
이와 같은 “무늬의 큐레이션”(54쪽)를 비롯해 ‘나’가 윤도와 함께 간 오락실 노래방에서 부르는 박효신의 <동경>, ‘나’가 윤도나 무늬와 함께 본 영화 <해피 투게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잡지 『유행통신』 『키노』 등등, 『1차원이 되고 싶어』에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만화와 음악, 영화와 잡지 등 다양한 대중문화의 목록이 풍성하게 등장한다. 그 시절의 대중문화에 흠뻑 빠져 살아온 세대에게는 특별한 향취를 불러일으키고, 그 이후 세대에게는 새로운 발견으로 다가올 이 목록은 소설의 배경에 생생함을 더할 뿐 아니라, 그 시절의 우리를 견디게 한 것, 그럼으로써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온 것이 무엇인지를 돌이켜보게 하고 그 시대를 새로이 조명하게 해준다.
“두고 온 것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나’와 윤도, 무늬와 나미에 언니 사이의 복잡한 감정과 여러 사건들이 무엇보다 먼저 가슴 설레는 로맨스로 다가오지만, 그것만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다. 소설은 현재의 ‘나’가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메시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해, 그가 D시의 호수에서 백골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과거의 비밀을 둘러싼 궁금증을 서사의 중심에 둔다. 백골 시신의 정체는 무엇이고, 그는 왜 죽은 것일까. 그리고 그 소식을 지금에 와서 ‘나’에게 전하는 이는 대체 누구일까. 소설은 과거 시점으로 진행되는 서사의 사이사이에 현재 시점의 ‘과거로부터 온 편지’를 교차시켜 보여주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그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에서 엄마의 단짝인 미라 아줌마와 그 가족인 태란 누나와 태리, 무늬의 친구 희영, 부반장 정동훈 등등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나’와 얽혀들 때마다 독자는 그들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나’와 그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숨기며 상처를 주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감싸고 안아주는 모습은 어쩌면 성장이라는 것 자체가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스릴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1차원이 되고 싶어』는 그 자체로 로맨스이자 미스터리이고 스릴러인, ‘박상영이라는 장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나’가 과거의 기억에서 마주한 진실은 그저 달콤한 것만도, 그저 고통스러운 것만도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속에서 다만 그저 점일 뿐이었던 자신이 타인과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던 그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함으로써 현재의 ‘나’는 잊어버리고 있던 과거의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과거의 ‘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게 된다. 마침내 과거와 더불어 고통의 물살을 헤쳐나가는 그 모습이 소설이 끝난 뒤에도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는다.
사실 나는 구원의 서사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관계를, 그 시절 내 삶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구원의 존재를 가상의 세계 속에서나마 찾아내고 싶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 추천의 말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읽다 문득 어디선가 라일락꽃 향이 느껴졌다. 2002년 수성못의 물비린내가 아니라 4월의 라일락 향을 맡은 건 아마도 1983년 봄, 첫사랑과 아작이 난 후 멀쩡한 척 언덕배기 집으로 걸어가던 그날 밤의 내가 소환됐기 때문이리라. 이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사랑으로 인해 알게 된 나약하고 음험하며 비겁했던 나를, 그 순간의 절망적인 행복감을 기억하게 하는. 그래서 매료당하고 그래서 심장이 뛴다. 그날 무덤덤하기로 각오했던 나는 언니가 피아노로 치던 〈사랑의 찬가〉를 대문 앞에서 듣다 무너져버렸다. 한참을 울었고, 영문을 모르는 언니는 그 곡을 열 번은 넘게 연주했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내가 그때의 기억을 이리도 잘 기억하고 있는지 몰랐다. 감정을 직시함으로써 세상을 읽어내는 박상영의 절절한 문장 덕분일 것이다. 우리 모두 1차원의 세계에 머물던 감정이 있었다. _변영주(영화감독)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박상영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을 바꿀 것이다. 천삼백 매가 넘는 첫 장편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포박에 가까운 몰입을 이끌어내는 작가를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미드 템포의 여름 노래 같은 도입부, 매력적인 인물들과 그들이 나누는 경쾌한 대화에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통증을 수반하기에, 성장소설인 척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점점 폐허의 표정을 드러내고, 방점은 성장이 아닌 생존에 찍히기 때문이다. 박상영이 웃지 않는 얼굴로 만드는 뚜렷한 파문, 검은 물 아래 은폐된 것들을 기어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내려는 몸부림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체온과 체취를 가진 몸들이 부딪치고 다치고 해치고 망치는 세계에서 과거와 현재는 위태롭게 진동한다. 차원을 슬쩍 비켜난 D시에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의 마음으로 갇혀 우리를 할퀴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재경험한 후 찾아오는 탈력에는 기이한 해방감이 있다. 이 모든 자상과 열상을 안은 채,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질문의 답은 그의 다음 작품에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_정세랑(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