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첫비’는 없는데 ‘첫눈’은 있는가.”
매우 사적인 ‘시간’,
그 ‘순간’의 체험을 우리도 모르게 선사하는 책.
문학평론가이자 연구자, 무엇보다 ‘글쟁이’ 함돈균의 인문학 이야기 『순간의 철학』을 펴낸다. 책 속에서 저자는 시와 소설이라는 문학은 물론 역사와 철학, 종교와 사회 등 드넓은 인문학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시간’의 본질과 의미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시간’, 일상의 특별함을 새롭고도 낯설게 되돌아보게 하는 글들을 묶었다.
「노을이 지는 6시 47분」 「지하철 플랫폼 오전 8시」, 매일 반복되는 ‘시각’에 숨은 의미를 포착하고, 「파도 타는 시간」 「책을 읽는 시간」 등 동사로서의 ‘순간’을 재발견하며, 사건적인 「신학기」, 서럽고 설익고 낯선 「서른 살」처럼 저마다의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보편의 시간 속에서 개별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책. 순간의 고유함과 일상의 특별함을 새롭고도 새삼스럽게 깨우치는 책.
『순간의 철학』은 『사물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바 있는 인문 에세이와 동시에 기획하고 집필했던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전작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들을 사회나 인간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고찰했다면, 이 책에서는 일상 속 ‘시간’, 익숙하여 깨닫지 못하는 순간의 특별함과 존재의 의미를 내밀히 다루었다. 가시적 사물이 아닌 추상적 시간을 탐구하는 만큼 보다 도전적인 자세로 끈질긴 ‘길어올림’에 투신한 결과물이다. 저자의 본령이라 할 문학 텍스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일상 속 매체에서 가림 없이 사유의 단초를 포착했다. 집필을 시작한 후 9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보다 넓은 사유의 지평, 더욱 깊은 시선의 저변으로 나아갔다 하겠다.
일상은 성속聖俗의 변증법으로 점철되어 있다. 교회당이나 절로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으로 귀환하지 않아도 삶의 모든 찰나에 우리가 개방되어 있다면, 훈련되어 있다면, 또 행운이든 불운이든 인생의 어떤 순간을 당신이 마주하게 된다면, 이 변증법을 감지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독자들과 이 변증법을 공유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종교」 중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영원은 찰나에 깃들어 있기도 하다.
‘찰나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깊어지는 인문학 이야기’. 이 책의 부제로 저자가 가닿고자 하는 시간의 본질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찰나 또는 순간」이라는 글에서 겁의 어원인 ‘kalpa’, 찰나의 어원 ‘ksana’라는 산스크리트어와 불교적 해석을 실마리로, 빅뱅과 시공간이라는 현대물리학의 설명을 거쳐,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현대철학자 벤야민의 관점을 아우르고, 소설 『구운몽』과 보들레르의 시를 빌려 짧은 순간에 깃든 우주적 계기와 사물 세계의 인연, 연기(緣起)를 본다. 그는 무한대의 ‘영겁’과 무한소(無限小)의 ‘찰나’를 관통하는 것이 시간의 특이점, ‘사건’이라 말한다. 책의 여정을 따라 경계 없는 배움과 한계 없는 사유를 지나온 우리는 매 순간을 ‘사건’의 차원으로, 스쳐지나는 찰나를 영원한 의미의 층위에서 되돌아보게 된다.
함돈균은 이 책에서 전방위적 지식에 특출한 직관을 더해 이제껏 없던 새로운 사유를 펼쳐내고 있다. “문장 중심으로 논리적 통제 없이 정서적 흐름을 자유롭게 써나갔다”고 밝힌 바대로, 독자에게 보다 친근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촘촘한 해석을 풀어냈다. 크리스마스캐럴, 새벽 2시 라디오, 공항의 입국장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정경은 물론, 서태지의 <소격동>이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같은 노래, <스타 이즈 본> <감기> <러브 액츄얼리> 등 친숙한 영화를 통해 우리 곁에 바짝 다가서서 시간을 듣는 귀와 영원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 스스로 ‘사유자’이기에 앞서 ‘글쟁이’에 가깝다 말하는 저자가 선물하는, 철학서를 대신하기에 충분할 ‘에세이’인 셈이다.
오늘 저녁은 노을을 보며
이 진실의 시간을 걸어보라.
총 3부로 나누어진 본문을 읽어나가다보면 단순히 이해하고 끄덕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왜 ‘첫비’는 없는데 ‘첫눈’은 있는가” 물어올 때, “책상 ‘위’에 놓인 『장자』를 집어드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서른, 서른, 서른……이라고 입으로 몇 번 소리내어보자” 제안할 때, 우리는 어느새 반복되던 일상에 낯선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늘 마시던 커피잔에 비하자면 작기만한 찻잔이 반복되는 ‘따뜻함’이자 주고받는 대화의 그릇임을 상기하며, ‘서른’이라는 소릿값 속에 ‘서러운’ ‘(낯)설은’이라는 언어철학적 통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연상에도 가닿는다. 예컨대 『순간의 철학』은 시간의 철학을 알려주는 이론서가 아니라 순간을 ‘철학하게 하는’ 가이드북이라 하겠다.
책의 표지에는 사진작가 김수강의 작품 <Teabag 1>이 함께했다. ‘Being’ 연작 중 하나로, ‘검 바이크로메이트’라 불리는 19세기 프린트 기법을 사용한 사진이다. 기계적 매체에 손의 노동과 기다림의 과정을 더해, 티백이라는 일상의 사물에서 ‘시간’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 형식과 내용 모두 찰나를 영원으로 이끄는 책의 문장들과 맞춤하다 할 것이다.
집필에서 출간까지 9년여의 시간을 거치며 저자는 그간 글에서 드러냈던 뜻을 사회제도, 문화적 현실에서 실현할 사회적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액티비스트’로서 삶을 병행하고 있다. 인문학의 변치 않는 가치와 교육의 비전이라는 믿음 아래 ‘배움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있는 그는 이 책 『순간의 철학』을 통해 과거의 가르침을 닦아 현재를 깨닫고 미래를 배우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가 머리말을 대신한 글에서 밝힌 바,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영원은 찰나에 깃들어 있기도 하다”. 그것을 보는 것이 시인이라면,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순간이 곧 영원이자 ‘시’가 되기도 할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몽상도, 진실 묘사도, 건설도, 구원을 꿈꾸는 시간도 아니다. 책은 대안적인 차원에서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또다른 세계가 있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책은 여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저 존재할 뿐인 어떤 세계를 드러낸다. 그런 방식으로 책은 희망을 원한다. 희망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어떠한 절망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책은 ‘무하유지향’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고 생활하는 현실이 존재의 유일한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 쓸모를 지시하지 않는 세계라는 점에서 그곳은 거주의 조건이 상실된 곳이며 누구의 이해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의미와 가치의 유배지일 수 있다. 책을 읽는 시간은 그렇게 희망 없는 시간에 희망을 거는 기이한 시간 체험이다.
─「책을 읽는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