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 따윈 없다고 생각해.”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작가 강희영 신작 장편소설
“난 내 옷을 만들 거예요. 모두를 위한 옷을요.”
독특한 화법과 진지한 탐구 의식, 탄탄한 구성으로 “어디를 봐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뛰어난 작품”(소설가 박민정), “에너지와 기운이 강력한 소설”(소설가 정용준)이라는 찬사와 함께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강희영의 두번째 장편소설 『녹색 커튼으로』가 출간되었다. 첫 작품 『최단경로』가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는 삶의 돌발성과 그로 인한 상실의 슬픔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면, 두번째 작품 『녹색 커튼으로』에서 작가는 패션과 사진을 소재로 삼아 빠르게 부상하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유행의 시대에 진정한 자아란,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아름다움과 예술의 문제에 접근하는 참신한 시각과 눈이 부실 만큼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섬세한 문장이 어우러져 새로운 소설세계를 만나는 반가운 기쁨을 깨닫게 한다.
온 감각이 만개하는,
초록빛이 무성한 여름의 두 사람
패션계의 대표적인 행사로 손꼽히는 유럽 패션 위크, 덴마크의 어느 골목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포토그래퍼를 꿈꾸는 ‘차연’이 모델 ‘다민’과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낯선 이국에서 만난 또래의 두 여성은 “속내를 가리는 재주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든 제 본심을 말끔히 가릴 수는 없”(18쪽)듯이, “우리가 이럴 줄 알았”(10쪽)다는 듯이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며 자연스레 이끌린다. 둘은 패션쇼 애프터 파티에서 패션계 사람들과 섞이고, 아릿한 술기운으로 밤거리를 거닐고, 방파제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빵집에서 버린 데니시 롤과 호밀빵을 나눠 먹는다. 젊음이 가져다주는 무모하고도 들뜬 환희를 만끽하는 다민과 차연의 모습에서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설렘와 웃음, 아찔함, 애틋함이 초록빛 이파리처럼 반짝인다.
“난 공원 초입에 이르러서야 뒤미처 깨달았지. 너의 머리색을 말이야. 햇살을 받고서야 네 머리카락은 숨겨둔 청록빛을 드러내며 그 밤의 골목에서 맡았던 베르가모트 향의 뜻을 올올이 속삭였어.”(29~30쪽)
“유행을 끝내는 건 누굴까. 유행을 모르는 사람들?
혹은 너무 잘 아는 사람들? 너는 개중 어디에 속해 있었니?”
다민의 소개로 유명 패션지 에디터에게 자신을 알리고 그의 추천서를 얻은 차연은 귀국한 뒤로 패션 잡지에 사진을 실으며 커리어를 쌓아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층 성장한 차연과 다민은 다음해 여름 파리에서 재회하고, 함께 튈르리공원을 산책하고 이브 생로랑의 회고전이 열리는 프티 팔레를 찾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프탈렌 냄새 속에서 어색하게 손목이 뒤틀린 동일한 체형의 백색 여성형 마네킹들과 이제는 클리셰처럼 보이는 옷들, 그리고 살 수 없는 그 옷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뿐이다. 어쩌면 그때 차연은 다민이 모델 생활에 피로를 느끼고 있음을, 순간의 유행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은 패션에 대한 의심과 회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모델 뒤에 가장 많이 따라붙는 말이 뭔지 알아요? 패션도 스타일도, 아이콘도 뮤즈도 아니에요. 출신이죠. 모델 출신. 이것보다 수명이 짧은 직업은 아마 또 없을 거예요.”(66쪽)
그리고 얼마 후 다민은 모델 생활에서 은퇴해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차연은 그런 다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다민의 부탁으로 패션쇼 준비를 돕는다. 예쁜 걸 모아놓고 그걸 망쳐보겠다는, 그래서 유행을 끝내고 자신과 모두를 위한 옷을 만들겠다는 다민의 무모한 기획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못한 채로.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유행 그 자체,
허공을 떠다니는 녹색 커튼”
패션쇼보다는 연극적인 퍼포먼스에 가까웠던 그날의 쇼 이후 다민은 차연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로 패션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민의 안부보다 다민이 만든 옷의 행방에 관심을 가질 뿐, 오직 차연만이 다민이 남긴 메시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다민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민을 기억하며, 패션이란,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비로소 다시 생각한다. 다민이 남긴 것을 손에 쥐고, 다민의 뒤를 잇기로 결심한다.
『녹색 커튼으로』가 차연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되짚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쉴새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고 장막으로 가려진 무대 뒤에서 영원을 꿈꾸는 일, 젊음과 낭만,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세계의 허위를 찢고 어떤 형식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생생한 감각을 그려 보이는 일은 그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 커튼으로』는 자신을 활발하게 표현하는 것이 기본적인 조건이 된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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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커튼으로』의 주요 무대가 패션 위크의 런웨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뛰게 했다. 결코 ‘사실’ 그 자체를 포착해낼 수 없는 카메라로 ‘직진하면서도 구부러지는’ 빛을 기록하려는—뉴미디어 시대에도 과거를 결코 온존할 수 없다는 인간의 회한은 여전하거나 더 심화했으므로—화자를 따라 그가 목격한 런웨이의 걸음을 나도 함께 봤거나 수행한 것 같다. 조명과 플래시와 눈빛, 그만큼 수많은 빛이 교차하는 런웨이에서 그는 무대 뒤 녹색 커튼의 색채에 주목하며 아름다움을, 그리고 한국소설에서 유난히 조심스레 접근했던 말인 ‘예쁨’을 정치하게 탐구한다. 이국 체험의 꿈이 잠시 산산조각난 지금, 위성이 갱신하는 이국의 스트리트 뷰, 그 정확한 좌표를 통해 제시하는 예술가 소설은 강희영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리라고 확신한다. _박민정(소설가)
때로 한 계절의 풍경과 색채를 송두리째 가져가버리는 작품들이 있는데, 내게는 강희영의 『녹색 커튼으로』가 그러했다. 이파리, 오로라, 인어공주 동상, 녹색 커튼 등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녹빛의 이미지는 부재하는 ‘다민’과 그를 회상하는 ‘차연’의 기억과 어우러지며, 파릇하고 선명했던 한 시절의 여름을 정지된 스냅사진의 색조로 담아낸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다 거품으로 화한 인어공주처럼 낯선 아름다움을 그리다 영원히 증발해버린 다민, 끝내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안고 그가 남겨둔 미적 유산을 이어가는 차연의 애틋한 이야기에 나는 오래도록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_조대한(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