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이나 아이만은 아닌 아이일세!”
시대를 거슬러 스스로의 길을 보무도 당당히 개척해나간,
만고충신 성삼문의 딸 효옥의 이야기!
반드시 살아남아라. 살아 있어야 살게 할 수 있느니라.
반드시 꿈꾸거라. 꿈이 있어야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느니라.
난신亂臣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주고……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1456년 9월 7일
소설 『효옥』은 『조선왕조실록』 속 한 문장에서 비롯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카를 몰아내고 기어이 임금자리를 차지한 수양대군, 세조. 그가 불러온 계유정난이라는 파란 속에 어린 세손 단종을 부탁한다는 세종대왕의 고명을 받들고자 죽음마저 불사한 만고충신들이 있어, 그 기리는 이름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였다. 이 절신(節臣)의 하나 성삼문이 죽음 앞에 지고의 믿음으로 벼림으로 남긴 희원, 사위지 않는 불꽃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딸 효옥이다.
소설 속에서 효옥은 계유정난으로 시작해 예종 대에 이르기까지 피바람 부는 세월을 지난다. 충신이 난신이 되고 간신이 공신이 되는 난세를 탄식하며 시작된 이야기는 옳음과 바름으로 다시 세울 시대를 발원하며 나아간다. 저자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라 일컬은바 “신의와 믿음을 위해 처참하게 죽은 사람들을 안타까워하고 같이 눈물 흘리는 마음”, 작고 미약하나 기어이 어두운 골짜기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촛불”이 곧 효옥의 삶이다.
욕된 자들의 계책으로 고문받고 멸문당한 충신들의 비통함, 그럼에도 한 점 붉은 피로 아로새긴 충절의 통렬함을 모두 소상히 담았다. 양반집 규수에서 한순간 노비가 된 효옥이 곡절 속에서도 맑은 눈으로 세상을 직시하고 나아갈 길을 열어내는 여정 또한 비감하나 아름답게 그려냈다. ‘조선의 충절을 만들었다’는 창녕 성씨, 효옥이라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의인들이 믿음으로 보태고 희망으로 따르는 이야기이자 제힘 다해 피어올라 스스로 불이요, 빛이 된 효옥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빛이 비록 가냘픈 것일지라도 짙은 어둠 속에서라면 하늘의 별빛과 다를 수 없다. 붙잡을 수 없으나 외려 그러해서 길잡이 빛이 되는 것 말이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우는 게
어찌 사랑 때문만이겠습니까
효옥은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한 집현전 학사 성삼문의 딸이면서 당대 으뜸의 무장 성승의 손녀이기도 했다. 여식으로 태어나 칼과 활에 어린 눈을 반짝이고 바둑으로 수를 겨룰 줄 알며 날카로운 눈과 날랜 손으로 은공예를 다루는가 하면 예의 명민함으로 장사와 사교에까지 능한 인물이다. 문무(文武)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두루 거치고 양반의 삶부터 노비의 삶까지 겪어내었으니 효옥은 일생으로 조선의 만민, 백성을 대표하고 아우른다 하겠다.
그 효옥의 한편에는 날 적부터 곁을 지켜온 노비 바우가, 또 한편에는 세조의 둘째 아들이자 예종이 된 해양군 황이 있다. 때로는 얽히고설키며 때로는 비껴 흐르는 세 인물의 이야기는 울음만 아니라 웃음으로 꽃피고, 설움뿐 아니라 설렘으로도 빛난다. 묵직한 듯 가뿐하게 이야기를 내달리니, 곡진한 이야기일수록 쉬이 읽히고 기꺼이 들려야 가닿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랑의 생생함은 ‘살아 있어야 살게 할 수 있음을, 꿈꾸어야 꿈꾸게 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함일 터다.
이름대로 단단하고 강직한 바우를 통해 효옥의 곧음을 내보인다면, 정인도 원수도 될 수 없음에 세상을 바꿔보겠노라는 예종은 효옥의 진취를 비춘다. 1년 남짓 짧은 재위에 그쳐 역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하였으나 예종의 치세에는 앞서간 개혁 군주의 면모가 있었다. 즉위와 동시에 부패한 공신들이 권력을 전횡하던 분경과 대납을 금지하는 등 시대를 바꾸고 세태를 바로잡으려 가파르게 달려나간 예종이었다.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제 몫으로 제 품으로 한목숨을 오롯이 살아내는 바우, 양반이자 비자도 되어보았기에 선비 노비 없이 다 같은 사람임을 깨친 효옥,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모든 백성의 존귀함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예종. 세 인물의 뒤얽히는 관계를 애정과 우정으로 가늠하다보면 만민 만인의 존엄을 새삼 다시 새기게도 된다. 결국 사랑을 빌려 사람을 이야기함이니,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우는 게 어찌 사랑 때문만이겠”는가.
아무도 못 가본 새 길을
우리가 가고 있는 거요
1453년 계유년 음력 10월 10일. 권력과 부귀를 놓고 패와 편이 나뉘었다. 생살부(生殺簿)라는 명단 하나로 삶과 죽음이, 이긴 자와 진 자가 쉬이 갈렸다. 신의를 지키는 자들이 스러졌고 변절한 이들이 권세를 틀어쥐었다. 충신의 기개를 꺾을 수 없어 베어버리니 형장 앞에 뿌려지는 피의 참혹함이 아프도록 생생하였다. 이 참담이 작금이라고 재현될 일 없을 것인가. 그것을 물으러 이야기가 비롯되었고 사라진 효옥과 가려진 예종을 되살리게 하였다.
『효옥』은 전군표의 첫 소설이다. ‘첫’이 무색하도록 진중한 익힘과 탄탄한 갖춤으로 풀어냈다. 실록과 사료를 톺으며 연필로 쓰고 지우기를 거듭한 천여 쪽의 원고가 책으로 엮이기까지 준비에만 여러 해가 걸렸다. 그 세월만큼 살펴 효옥의 일대기로 옮겨내었으니, 이 책은 옛 역사를 빌려 새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꿈이라 하겠다. 꿋꿋한 직시로 옮긴 무참한 역사에 상상력으로 보탠 마디마다 그의 바람이 실렸다. 지켜가고 나아가자는 효옥의 목소리는 곧 옛일, 과거에서 빌려온 금이자 옥이며, 앞날을 위한, 미래를 향한 비원이기도 할 것이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권세가들의 간악으로 아비를 잃고 노비가 된 효옥. 어린 나이에 풍파와 역경으로 내몰렸으나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 길을 펴는 효옥. “아이이나 아이만은 아닌 아이” 효옥. 매화와 대나무의 기치로 굽힘을 몰랐던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이 남긴 순하고 정한 빛의 보배, 그러나 단단하여 변치 않을 귀한 이름, 효옥(孝玉).
잇속에만 목마른 그릇된 위정자들에게는 신랄함으로, 올바름을 지켜내고자 맞서는 이들에게는 지지와 연대로 가닿을 이야기. 효옥은 곧 풍파 앞에 꺼지지 않는 촛불이요, 는개에도 젖지 않는 송백이요, 혹독한 추위와 겹겹 눈 속에서도 푸른 새싹을 밀어올리는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려나. 효옥이 동개활로 쏘아올린 화살은 이제 다가올, 마땅히 와야 할 새롭고 옳은 시대를 부르는 효시일 것이다. 그렇게 또 새봄은 지척일 것이다.
낮고 어두운 곳에서, 억눌러두었던 말들이 아름다운 글로 승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