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가문에서
개인이 탄생하다
18세기 조선 문단에서 혜환 이용휴만큼 개인과 자아 문제에 천착한 작가는 드물다. 거기에는 스스로 담담히 받아들였던 현실이자 평생의 굴레이기도 했던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이용휴의 큰아버지 이잠李潛은 남인이 몰락하고 노론 일색이 된 정국에 크게 좌절했다. 그런 가운데 소론계 상소를 올렸다 흑산도로 유배된 임부林溥를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려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장희빈 사건에 뒤이은 임부의 상소로 그간의 혼란과 분노를 간신히 잠재우고 있던 숙종이었기에 분노는 더욱 폭발적으로 표출되었다. 『숙종실록』은 이 사건을 두고 “흉인凶人 이잠이 상소했다”고 적었다. 격노한 숙종은 이잠을 직접 친국했고, 그는 일주일간 열여덟 차례나 이어진 혹독한 형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잠이 상소 때문에 숙종에게 맞아 죽은 사건은 이잠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가문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이잠이 장살杖殺당하고 그가 올린 상소문이 대표적인 흉소凶疏가 된 후, 그의 가문 사람들은 스스로 출사할 생각을 접었다. 성호 이익이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건은 물론 후대인 이익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그 후대인 이용휴의 아들 이가환李家煥까지 조정에서 갖은 비난과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영조와 정조의 신임과 총애에도 불구하고 이맹휴 이가환은 지워지지 않는 이잠의 그림자 아래서 끝내 뜻을 펼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본 이용휴가 28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도 벼슬의 뜻을 펴지 않고 문학에 전념한 것은 이잠 사건이 남긴 여파가 관직에 진출하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용휴는 실력 있는 자가 응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비난의 공적이 되기도 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아주 가까이서 목격하고 경험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세계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개인’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개인을 둘러싼 가혹한 환경의 제약 속에서 진정한 개인이 태어난다. 외부의 조력 없이 자신의 힘과 실력으로만 증명하게 되는 나력裸力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나력이란 권력이나 지위가 사라진 뒤에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나만의 실력을 의미한다.”(23-24)
그가 스스로 인정했든 인정하지 않았든 간에 삶은 순탄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시험으로 출사하기를 포기한 그에게 세상을 향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실제로 문형文衡이 될 수는 없지만, 재야의 문형이 되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문학을 완성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문단文壇에 영향력을 끼치는 삶만은 그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24)
이용휴는 그 야심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당대 문단에서 문제적 인물이 되는 데 성공한다. 뛰어난 중인들이 제자 되기를 자처했고, 남인문단의 중요 인물들과 끊임없이 교유했다. 이용휴의 문학은 재야에서 그들에게 내밀한 영향을 미치면서 당대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진실이 지극할 때
드러나는 기이함
이 사람의 문장은 매우 괴이해서 (…) 결단코 다른 사람과는 다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의 병통이기는 하나, 또한 하나의 기이한 점이기도 하다. 혜환은 장서가 매우 많아서 소유한 것이 모두 기이한 문장과 특이한 서책으로 평범한 것은 한 질도 없으니, 대개 그의 기이함은 참으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273)
유만주가 『흠영』에서 지적한 대로, 이용휴의 문학은 당대에도 기이한 것으로 여겨졌다. 저자의 말처럼 이 기이함은 “충실히 이해한 뒤에 얻은 궁극의 성취”이자, “같아지다 보니 끝내 달라져버”린 절차切磋의 결과였다. 이용휴의 문학이 기궤奇詭하고 첨신尖新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그의 예술적 편력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 문인들 흉내나 내서 끼리끼리 인정해주는 글 따위는 애초부터 그의 안 중에 없었다. 그는 중국 본토의 문인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글 혹은 그들보다 뛰어난 문학을 선보이고 싶어했다. 이렇게 중국 문학을 충실히 학습한 결과 그의 글은 더욱 새롭게 바뀌었다. 일 부러 새로워지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새롭게 됐다.(149)
이용휴의 적독가 기질은 유별났다. 사고전서를 널리 꿰고도 끝없이 책을 찾아다닌 장서가이자 독서광이었던 그는 당시로서는 구하기 어려운 최신 중국 서책까지 수장해 탐독했다.(“현지 사람들도 의아해하여 책을 찾는 이에 대해 호기심을 품었을 정도였다.”(154)) “이용휴는 고서古書를 널리 읽어서 자구字句마다 근거가 있다”고 한 이덕무의 평가는 혜환의 독특한 독서 이력과 그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전고典故의 활용을 간결하게 설명해준다. 그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전고가 아닌 궁벽한 전고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 모든 사물에 호기심을 품으며 남들이 다 읽는 책뿐 아니라 누구도 읽지 않는 책까지 샅샅이 찾아 숙독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과 감흥을 자신의 글에 녹여내고자 했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화에 안목이 높았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른 혜환은 작품을 수집하고 제발을 붙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이들이 표암 강세황姜世晃과 그의 처남 유경종, 남창 김현성金玄成 등이다. 특히 강세황의 제자 김홍도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붓이 가는 곳마다 신묘함이 함께했다. 푸른 머리카락이며 금빛 터럭, 붉은 실과 흰 실을 묘사한 것은 정교하고도 아름다워서, 옛사람이 자신을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긍심이 대단하여 그림을 가볍게 그리지 않았다. (…) 비유컨대 문자가 사람의 이름이라면 그림은 그 얼굴이다. (…) 그림과 문자가 분리되어 외롭게 행해짐이 얼마였던가! 지금 다시 합해졌으니 양가兩家가 서로 축하할 만하다.(109)
특히 서화가 허필許佖과도 교분이 두터웠는데, 허필은 평생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유랑한 자유로운 예술가였다. 강세황, 심사정, 최북, 김홍도 등 당대 거물급 인사들과 어울린 그를 위해 혜환은 친히 생지명生誌銘을 써주기도 했다. 세상의 눈으로는 그만한 한량이 없었으나, “혜환은 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했고 실제로 이해했다. (…) 혜환은 허필이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그의 삶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했다.”(125)
조선의 이름난 여행가 정란鄭瀾도 혜환이 각별한 애정을 보낸 이였다. 일찍이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오로지 유람만을 일삼아 백두산, 금강산, 태백산, 한라산 등 전국 각지를 떠도는 그를 혜환만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알아주었다. “속물근성이 뼛속 깊이 들어간 자로서는 이 일을 비웃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백 년 후에 비웃은 자가 남아 있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가 남아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하겠다.”(131)
이렇게 “계층적으로는 중인들, 정서적으로는 마니아적인 인물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예술에서 진정성을 알아보았던 혜환의 예술관은 그의 문학관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이름 높은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고 거기에 기대어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보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예술을 펼치고, 그 안에서 세계에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세계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나’라는 축軸이 바뀌면 ‘세계’도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시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원점에서 문학을 재인식하고, 전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고자 했다.”(163)
기이해도 나의 집我菴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간다
나와 남을 놓고 보면, 나는 친하고 남은 소원하다. 나와 사물을 놓고 보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도리어 친한 것이 소원한 것의 명령을 듣고, 귀한 것이 천한 것에게 부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욕망이 그 밝음을 가리고, 습관이 참됨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이에 온갖 감정과 여러 행동이 모두 남들을 따라만 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한다. 심한 경우 말하고 웃는 것이나 얼굴 표정까지 저들의 노리갯감으로 바쳐지며, 정신과 사고와 땀구멍과 뼈마디 하나도 나에게 속한 것이 없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168)
정약용이 재야문형在野文衡이라고 별칭한 이용휴의 문학적 존재감은 사실 이용휴라는 인물 자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용휴가 문학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자기만의 생각,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 타인을 대하는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자기 자신과 맺은 관계에 대해 번다한 수사 없이 짧은 편폭으로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하나같이 기발한 발상과 착상을 담고 있어 다른 어떤 글과도 다른―세계에서 시작되었으나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저자의 존재를 중심에 드러낸다. 망인을 기리는 글에서조차 생을 미화하는 법 없이 살아온 방식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애도하는 ‘자아’를 인식하게 한다.
시를 산문처럼, 산문을 시처럼 쓴 그는 자신의 문학이 다른 이들의 것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된 나를 찾겠다는 각오의 순간”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이의 글은 그 어떤 성인의 지극히 높은 말보다 더 힘 있는 진실을 보여준다. 습習을 피하려다 생긴 습마저 바로 그 각오의 표현이었다. “시는 평측과 압운을 지키지 않고 근체시의 금기들도 훌쩍 뛰어넘었다. (…) 산문에선 문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려고 노력했다. 서사보다 의론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어떤 글에든 내 할 말을 담겠다는 것이다. 거기에 기발한 발상이 더해졌다.”(277) 새로운 내가 탄생할 때, 진정한 개인이 태어난다.
차꼬를 풀고 형틀에서 벗어나니 나 오늘 새로 태어난 듯하다. 눈이 더 밝아진 것 아니고 귀 더 밝아진 것도 아니나, 하늘이 내린 밝은 눈 밝은 귀가 옛날과 같아졌을 뿐이로다. 수많은 성인이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 나는 나에게 돌아가기를 구하리라. 갓난아기나 어른이나 그 마음은 하나인 것을. 돌아와보니 새롭고 특이한 것 없어 다른 생각으로 내달리기 쉽지만 만약 다시금 떠난다면 영원토록 돌아올 길 없으리. 분향하고 머리 조아려 천지신명께 맹세하노라. 이 한 몸 다 마치도록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가겠노라고.(171-172)
지난날 그대가 내게 시를 줄 적에 / 광기光氣가 종이 뒤에까지 사무쳐 / 책을 미처 펼쳐 읽기도 전에 / 기이한 보배가 있다는 걸 알았네昔君詩贄我, 光氣透紙背. 未及開卷讀, 已知異寶在. _「2장 그와 같은 그의 벗」
무릇 정원에 비가 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많은 이가 같고, 비가 내리기를 원하는 것은 그 한 사람의 유별난 생각이다. 그러나 한가로운 뜰에 비가 지나가고 먼지가 공중에서 씻겨 외로운 꽃이 머리를 감은 듯하고 우거진 풀은 더욱 싱싱하게 푸르면 도리어 비가 오지 않은 때보다 더 낫다. 이것은 단지 은연중 마음에 이회理會할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세상 사람을 향하여 이해를 구할 것은 없는 것이다. _「3장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바쁜 자는 옳고 한가한 자는 그르다는 것이 통념이다. 혜환은 바쁜 자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과 한가한 자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대비시켰다. 이를 통해 한가함을 ‘조물주가 자신에게 부여한 모든 것을 누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주체가 되는 하루는 남들의 100일에 해당되고, 그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남들이 100일을 산다 해도 옹의 하루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정리해보면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된 삶이란 의미까지 담고 있는 셈이다. 당시 한가함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독특하게 해석한 작가는 매우 드물다. _「3장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그가 주로 만났던 인물들은 크게 중인과 친인척들이었으며, 불우한 사대부들이 전부였다. 그를 가리키는 재야의 문형文衡이란 말은 찬사로도 들리지만 끝내 제도권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주변부만 맴돌아야 했던 아픈 속내도 함께 보여준다. 누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를 통해, 그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혜환은 능력자를 만나 도움을 받아 성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소외된 이들의 재주를 개발하고 싶어했다. 그것은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처지와 삶을 그들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_「4장 혜환 문학의 미학과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