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을 받지 못한 문집
45년의 길지 않은 생을 살다 세상을 등진 조귀명은 문과에 급제하진 못했지만 당대에 문장가이자 비평가로서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는 김광국의 『석농화원』에 실린 신사임당의 그림에 제화를 썼을 뿐 아니라 정선, 윤덕희, 심사정, 윤용, 이인상 등 당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친 화가들의 그림과 윤순 등의 글씨에 제발을 달기도 했다. 그는 44세의 나이에 자기 글을 모아 추리면서 문집을 펴내려 준비했고, 세 명의 젊은이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청탁받은 이들은 황경원, 이천보, 남유용으로, 모두 조귀명보다 열다섯 살 이상 어렸고 아직 관직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이 세 사람 모두 서문을 쓰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리고 이듬해, 조귀명은 급작스레 세상을 떴다. 비탄스럽게도 서문을 모조리 거절당한 문집, 이듬해의 사망, 조귀명의 청을 거절한 황경원이 꿈속에서 마음 아파하며 조귀명의 영령을 만나는 일, 문집 서문이 아닌 묘지명을 쓰게 된 일로 이 책은 삶에서 어긋났던 서로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단단히 맺어지는 일로 서두를 연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다섯 해 되던 해에 나는 청계산에 올라 공의 묘소에 조문하였다. 열두 해 뒤 경주 부윤으로 나갔을 때 나는 공의 문집을 판각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내가 공을 가장 깊이 알고, 죽을 때까지 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황경원이 묘지명 앞에 붙인 서문)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집을 만드는 데 꽤나 공을 들였다. 죽은 뒤 남겨지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그런 문집에 서문을 받는 것은 권력과 이름 있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인정받는 길이었다. 하지만 조귀명이 서문을 부탁했던 세 젊은이는 아직 사회적 지위나 학문적 업적을 이룬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무례함을 무릅쓰면서까지 손을 내저었던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당시 노론계-소론계의 대립이 어려 있었고, 주자성리학에 대한 입장 차이, 불교적 사유와 글쓰기에 대한 우려 등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조귀명으로서는 거절로 인해 자기 사유와 글쓰기를 거둬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단적 사유, 유불도의 통합을 통해 그는 이미 시대의 관성과 사고를 뛰어넘어 자기만의 문장을 획득했노라 자부했기 때문이다.
질병은 어떻게 새로운 길을 내었나
소론계의 명문 풍양 조문의 자제로 태어난 조귀명에게는 평생 남들보다 열등하게 지내야 했던 약점이 있었다. 바로 열 살 무렵부터 기이한 병에 걸려 평생 질병 속에서 몸을 사리고 우울한 날들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병과 함께 태어났고 병과 함께 자라서, 일찍부터 병에 대하여 묵묵히 알아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마음으로 즐기는 것과 일삼아 경영하는 것 어느 하나 병 때문에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 평소 우울하게 지내며 스스로 위안할 것도 없었다.”(「병해病解」)
7세에 스스로 한문을 깨우치고 13세 때 과거시험장에서 대책문을 순식간에 써내려간 일로 유명했던 그이건만 병약한 신체는 문과 급제의 꿈을 접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아져 잠깐 바깥을 나들이할 때를 제외하면 내내 방에서 자리보전하며 스스로를 보살펴야 했다(30세에는 구안와사를 앓아 칩거하다시피 했다). 이때 그가 탐닉하게 된 것이 그림과 글씨, 문학이었다. 조귀명은 23세에 이미 유가, 불교, 노장의 서적들을 대략 살펴봤다. 20대에 쓴 글에 장자의 표현이 자주 나타나며, 38세에는 『노자』에 대한 독후감을 짓기도 했다. 또한 주자성리학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그는 문장 공부의 전범으로 『능엄경』을 꼽았으며, 『원각경』의 간결하고 절묘함과 『유마경』의 웅장하고 분방한 문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춘추좌씨전』과 『사기』를 열심히 읽었으며, 소식의 문장을 흠모해 문학적 지향점을 그에게 두었다. 뿐만 아니라 조귀명은 역사서 읽기에 몰두해 「독사讀史」라는 글을 짓는 등 30세 이전에 이미 폭넓은 정신세계를 형성해가면서 거대 담론에 관해 쓴 글도 여러 편 되었다.
이것은 모두 그가 오로지 방 안에서 책과 글씨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부모가 배려해준 덕이었고, 주류에 속한 다른 이들처럼 과거 공부나 심성 수양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이러한 독서는 특정 주제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입장을 뚜렷이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로써 그는 강한 지적 자의식을 형성해갈 수 있었다. 당대에 허황한 이야기로 취급되던 『산해경』을 열심히 읽었고 텍스트 비평까지 가한 것만 봐도 그의 독특한 면모를 알 수 있다.
그는 글씨보다 문장이 중요하고, 문장보다 도道가 중요하다는 일반론을 부인하진 않았지만, 취미나 습관의 영역에서 자신처럼 문장과 글씨에 빠지는 것이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사실 당대 사람들은 조귀명이 노불의 도에 빠져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당당히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저 역시 성인이 되는 길이 있다는 거야 잘 알지요. 하지만 구구하게 문장 좋아하는 취미를 떨치기가 이렇게 어렵네요.”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나밖에 없다
당대에 아무도 서문을 써주지 않을 만큼 진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지만, 조귀명은 바로 그 점이야말로 자기 시대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고 귀한 자질임을 치열한 독서와 문장 속에서 입증해갔다.
모두 당연시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환기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의 허를 찌르고 새로운 깨달음을 던지는 사유 방식 및 표현 기법은 조귀명이 스스로 확립했던 바다. 당시에는 당송고문을 전범으로 삼던 이들과 선진·양한 고문을 배우자는 주장이 두 파로 나뉘어 대립 양상을 보였다. 특히 앞쪽은 문장가이면서 성리학에 충실했던 김창협을 중심으로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조귀명은 양쪽 다 경계하며 산문의 문예미를 추구해나갔는데, 특히 지난 시대 성대했던 문장을 지금에 와서 따르려 애쓰기보다 지금 나의 문장을 하면 된다는 논지를 펼쳤다.
“다만 내 식견과 깨달음을 기준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아서 맞으면 취하고 맞지 않으면 버릴 뿐입니다. 요컨대 천고의 학술과 문장이 나에게 재단되어야지 그것들이 나를 재단할 수는 없으며 나에게 부려져야지 그것들이 나를 부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나는 나의 말을 말하면 그뿐이지, 남이 나에게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말은 물론 옛글의 섭렵과 조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섭렵 역시 나의 견식을 위해 활용할 자료로서 중시되며, 전범의 설정과 학습 자체는 ‘나의 견식해오見識解悟’를 중심으로 상대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그 말을 하기 전에는 모두 그런 이치가 있는 줄도 몰랐다가 자신의 말이 나오고 나서야 이로써 그 이치가 있게 되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조귀명의 앎은 말하자면 교화와 경세에 보탬이 되겠다는 전통적인 효용 가치와는 달리 삶의 구체적인 국면에서 스스로 깨달은 ‘자득自得’을 기준으로 했다. 이는 식견에 ‘진실성’만 있다면 이치의 옳고 그름마저 상대화할 수 있다고 여긴 점에서 당시의 문인들과는 큰 간극을 보였다.
이천보는 조귀명이 깨달은 바가 남달리 매우 깊어서 세상 밖에 홀로 서서 조물자와 함께 노니니 그 글로 인한 명성이 이미 높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명성이 난다는 것은 조귀명에게 병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까지 나서서 그 병을 더 중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논리로 서문 의뢰를 거절했다. 원고를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없어 돌려준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서문을 원한다면 자기로서는 “이것은 간천 조석여의 글이다. 이 글은 요즘 사람의 글도 아니고 옛사람의 글도 아니다. 단지 그 사람됨과 같을 뿐이다”라는 말 외에는 쓸 수 없다고 했다._22족
조귀명은 글씨보다 문장이 중요하고 문장보다 도가 중요하다는 일반론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취향과 습관의 영역이라면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므로 문장이나 글씨에 빠지는 것을 두고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피력했다. 이러한 논리는 29세 때 이익간에게 보낸 서신에까지 이어져서, 자신이 도학에는 성취가 없고 문학에서 그나마 진전이 있음을 밝혔다. 노불의 도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순전한 유가의 선비가 되었으리라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 조귀명이 웃으며 던지는 말은 늘 한결같았다. “저 역시 성인이 되는 길이 있다는 거야 잘 알지요. 하지만 구구하게 문장 좋아하는 취미를 떨치기가 이렇게 어렵네요.”_37쪽
밀랍을 깎아서 봉황을 만들거나 진흙을 주물러 사람의 모습을 만들면 쏙 빼닮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허물어져도 그리 애석해 하는 마음이 없다. 그것이 실체가 아닌 ‘헛것[환幻]’이기 때문이다. 달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이나 사물이나 그저 흙과 밀랍에 불과하며, 죽고 사는 것도 한 번 만들었다가 허물어지는 것일 뿐이다. 만든 지 오래 된 것이 장수이고 빨리 허물어지는 것이 요절이니, 허물어뜨리는 것이나 만드는 것이나 조물주의 ‘헛 장난[환희幻戱]’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이 당한 일은 헛것 가운데도 심한 것이니, 그 허물어뜨리고 만드는 데에 연연하여 기뻐하고 슬퍼한다면 너무 고달프지 않겠는가. 아아! 연연하여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헛것이고, 내가 헛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헛것이며, 묘지에 헛것이라고 기록하여 무덤에 묻어서 천고의 헛것을 깨뜨려 보지만, 이 묘지 역시 헛것이다._104쪽
다양한 불경을 구해 읽는 조귀명을 두고 우려를 표하는 지인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만훈 선사도 그가 불가의 도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이를 의식한 조귀명은 만훈 선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출세간의 법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오. 다만 세상의 유학을 한다는 이들이 유·불·도 삼교의 근원에는 어두우면서 마치 앞의 개가 짖으면 이유도 모른 채 따라서 짖어대는 개들처럼 앞선 이가 말한 구절만 답습하여 읊어대고 있는데, 이래가지고는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남의 잘못을 설복시킬 수도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근래 들어 불가에서 내전內典이라 부르는 불경을 이것저것 살펴보고 연구하는 것은 그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것일 뿐이오.”_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