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문재를 가진 지방 서얼
“구구하고 비루한 곳에 거처하는 선비는 밭두둑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보아도 그 재주가 미관 하나에도 얻을 수 없는지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천 리 먼 길을 오지만 벼슬길에서는 아무런 뜻을 얻지 못하고 물러날 적에는 또 황황하게 물러난다. 아, 슬프다.”(「목멱산기木覔山記」)
신유한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연보에 따르면 신유한은 돌잔치 날 『효경』을 집어 들고 어머니에게 배우기를 청했다고 한다. 5, 6세쯤에는 서당 선생에게 굴원의 「이소」를 가르쳐달라 청하기도 했는데, 선생이 그 작품은 어른들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신유한은 뜻을 알지는 못해도 혀가 있으니 소리를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신유한의 독특한 문학적 감각이 드러난다. 바로 글의 내용보다 글의 이미지와 음률 자체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서당 교육을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남들과 다른 문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문장이 아닐 뿐, 신유한의 글은 틀림없이 명문이었다. 평균 합격 연령이 34.4세였던 당시의 진사시에 신유한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합격했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이미 자신의 문명을 세상에 떨치게 한 시 「촉석루에 제하다」를 내놓았다. 이 시는 많은 이에게 회자되어 300편에 가까운 차운시를 남겼으며, 중국에까지 전해져 좋은 평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33세의 나이에 장원급제했으며 이때 쓴 「작고석탕참부」는 당시의 일반적인 안목에 부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명작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4년 가까이 마땅한 직책에 임명되지 못한 채 기다려야 했다. 지방 출신이라 기반이 없었던 데다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다림 끝에 봉상시에서 일하며 나라의 중요한 의례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그마저 높은 직책으로 올라가지는 못했고, 어디까지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 이상으로는 대우받지 못했다. 지방 현감 직책과 봉상시 업무를 오가는 동안 일부 문인과 관료가 그의 억울함을 논하기도 했지만 아직 출신과 신분의 한계는 공고했고, 그는 끝내 나라의 신하로서 출세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대한 억울함은 남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고 지은 글 「목멱산기」에 구체적이고도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해유록』으로 문명을 떨치다
“왼쪽으로 바라보니 큰 바다가 푸른 하늘에 맞닿아 천하에 아무것도 내 눈을 가리는 것이 없었다. 아늑하게 그 끝을 알 수 없고 드넓어 한계를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구주九州 안의 백공百工 만물, 고금의 서적, 사마천이 구경했다는 것과 초나라 좌사左史가 읽고 기록한 것이 탄환처럼 조그마한 것이었다.”(『해유록』)
그런 신유한이 기해년 조선통신사 파견에 제술관으로서 동행하게 된 것은 그가 문인으로서만큼은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는 증거다. 제술관의 주요 임무는 통신사행 때 필요한 글을 작성하고 여러 일본 문사의 시문 수창에 응하는 것이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일본 문인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조선의 문학을 대표하는 제술관의 중요성은 더 중요해졌다. 그는 약 7개월의 사행 기간에 6000여 수의 시를 창화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길 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통신사행록 『해유록』을 저술했다.
『해유록』은 아름다운 일본의 자연에 대한 감상 외에도 일본의 풍속, 문물, 정치·사회적 정황 등을 치밀하게 기록하고 있어 통신사행을 떠나는 후대 문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필수 참조 자료로 활용되었다. 『해유록』은 그 중요성과 문예적 성취 면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함께 ‘기행문자의 쌍벽’이라는 평을 받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는 집집마다 소장하고 애송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전 시기의 통신사 문학이 일본의 물건이나 풍습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정보를 전달하기에만 그쳤던 것에 비해, 신유한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순수하게 일본의 산천과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거기에 매혹되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는 등 통신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통신사행 이후 신유한의 문명은 더욱 높아졌다. 정6품 성균관 전적에 올랐으며, 그의 시구를 일본 사람들까지 외우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더군다나 신유한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큰 뜻을 펼칠 수 없는 좁은 땅 바깥에 끝없는 바다와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상상의 세계를 유람하며 자기 안팎의 경계를 넘고자 하는 신유한의 욕망은 통신사행을 계기로 더 강렬해졌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장
“부귀와 공업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오로지 문장만이 남에게 달려 있지 않고 나에게 달려 있음을 알겠도다.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은 본분이 아니겠는가.”
신유한은 이름난 문인이었지만, 그 이름만큼 수군거림이 따라다녔다. 조선의 문사들은 신유한의 문장이 괴이하고 난해하며 정도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왕세정, 이반룡 등의 전후칠자를 연상케 하는 문장을 구사했는데, 이는 조선 문인들에게 전범으로 받아들여지던 당나라의 시와 송나라의 산문과는 달랐다. 최창대나 윤순과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신유한이 특이한 문장을 구사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신유한은 어릴 적 일반적인 학습 과정을 따르지 않았으며 육경과 진한고문을 좋아하여 주로 읽었는데, 이런 취향이 진한 시대의 미감을 추구하던 전후칠자의 문풍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신유한은 도와 문이 별개라고 주장하는 것으로도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문인들은 성리학적 관점에 따라, 유교적 도를 보완해주는 의미로서만 문학을 인정했다. 그러나 신유한은 문학이 세상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문학에는 독립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문장이야말로 개인이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정의하기에 이른다. 이는 신유한의 삶에서 비롯된 것인데, 지방 서얼이라는 한계와 상관없이 그가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유한의 문학은 그의 삶과 떼놓을 수 없어서, 그의 작품에는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문학세계를 해명하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신유한에게 중요한 주제는 바로 ‘나’였고, 이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자주 형상화된다. 그의 시에는 억울함과 분노, 서글픔 등이 공존했으며 후기로 갈수록 점점 그 길이도 늘어났다. 하지만 신유한은 스스로를 ‘용문’이라 명명하고 자기 내면을 광대한 ‘운몽호’라고 칭하는 등, 불우함을 토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과 문학적 지향을 확실히 했으며 문학에 대한 자부와 포부를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명성을 남기다
신유한은 특이한 교육법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당장의 과거시험에 연연하거나 정해진 과정을 따르지 않고, 제자들의 부족한 점과 보완해야 할 점을 세심하게 살펴 각각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주었다. 이는 기존의 형식이나 관습보다 ‘진眞’, 즉 세계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문학의 길이라는 그의 입장과도 관련된다. 박이곤, 정원시, 원경하, 정란 등, 신유한의 문하에서 배출된 문인들은 요직에 진출하고 글과 공적으로 이름을 남겼다.
신유한 개인의 삶은 불우했지만 그의 문장만은 불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문집 『청천집』의 서문을 쓴 이미는 신유한이 뛰어난 문장으로 시대와 한계를 극복했다고 평가했으며, 『청천집』 속집의 서문을 쓴 권연하 역시 신유한을 두고 몇 세대에 한 번 나오는 영재라며 극찬했다. 훗날 성대중은 신유한이 남쪽 땅의 일개 선비로 태어나 30년 동안 문단을 주도했다고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청천집』은 수없이 인쇄하는 바람에 목판이 금방 닳아버렸다고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후대 문인들이 필사한 판본이 현재까지 다수 남아 있다.
신유한은 18세기 조선 문단에서 이채로운 문학 세계를 보여주는 문장가이다. 흔히 그는 통신사행록 『해유록海遊錄』의 저자로 기억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천하제일의 문장을 꿈꾸었으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고 또 좌절했으며, 길 위에서 삶의 모순을 목도했고,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하던 이였다. 그는 18세기 조선 문단에서 욕망, 모순, 균열의 지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_17쪽
그는 자신이 경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울에 올라온 후 여실히 자각했다. 시골 출신인 데다가 서얼이기까지 한 그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동분서주한다더라도 쉽게 중앙 관직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현실은 그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거친 삶의 질감, 냉소 그리고 약자에 대한 연민이 더해진 것은 또 바로 그러한 현실 덕분일 것이다. _76쪽
신유한의 목표는 최고의 문장이었다. 제자를 향해서 “천하제일의 글을 읽고 천하제일의 일을 하며 천하제일의 사람이 되어라”라고 했던 그의 충고는 의미심장하다. (…) 안연顔淵을 꿈꾸면 안연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발언에는 최고의 글을 읽고 그것을 학습하여 최고의 문예미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_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