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공부를 잘해서, 뚱뚱해서, 수줍음 타서…
학교폭력을 가하는 이들은 저마다 하나둘 이유를 댄다. 교실 속 수십 명 아이 속에서 유독 어떤 아이가 눈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인데, 책 속 여섯 명은 ‘성적이 좋아서’ ‘수줍음을 많이 타서’ ‘게임 아이템을 도난당해서’ ‘장애인의 동생이라서’ ‘뚱뚱해서’ ‘만만해서’ 등의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
“성적이 K보다 좋았던 나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압수당해 찢기곤 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엔 폭력이 자행됐다. 주로 폭언과 발길질이었고, 그다음 시험 성적을 낮추기 위해 학교를 파한 뒤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공부를 못 하도록 저녁 9시까지 놔주지 않았다.” 학교는 하나의 ‘사회’로서 권력과 위계가 작동하기에 서로가 가진 것을 빼앗거나 혹은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남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적을 낮춰야만 자신이 올라설 수 있기에 성적을 감시했고, 공부를 못 하도록 막을 수 있는 온갖 묘안을 짜냈다. 피해자는 몇 번이고 그 폭력 속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가해자는 이런 피해자에게 자살해버리겠다는 등 위협을 가해 다시 굴레를 씌워나갔다.
수줍음을 타는 아이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 무리를 지으면서 우리 편으로 만들기도 쉽지만 배척하기도 쉬운 대상이다. 쾌활한 아이는 다가와 말을 걸고 친하게 굴다가도 뭔가 자기 심기가 불편해지면 수줍음 타는 애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 밀치며 위협한다. 그 애는 “기분이 나쁘면 락스 냄새가 나는 화장실로 불러 말도 안 되는 걸 트집 잡고 사과를 요구했다. 반박하는 날에는 말대꾸를 했다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쳤다. 나를 왕따로 만들 거라고 했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앞으로 다시는 친구를 만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그게 너무 무서워 아무 말 못 했다. 그 애마저 잃으면 친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뚱뚱하거나 안경 쓰거나 여드름이 난 아이는 청소년기에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셋이 결합된 데다 소심하기까지 하다면 남자아이들 세계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지도 모른다. 더욱이 특출난 재능(그림 그리기)까지 겸비해 뭔가 얻어낼 것이 있다면 전교 ‘짱’인 아이가 자기 ‘밥’으로 삼기에 적당할지 모른다. 그때부터 피해자에게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쏟아지고, 빵셔틀은 물론, 돈을 뺏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병신 새끼’ ‘돼지 새끼’라는 욕설은 예사로 들었고, 코딱지를 먹어봐라, 실내화를 빨아와라는 요구를 받으며 온갖 굴욕을 당했다. 가해자는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놀랍게도 “걔는 괴롭히는 맛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누나 옷을 물려 입는 가난한 사내애는 힘을 과시하는 아이가 데리고 다니며 자기 가방을 들게 하고 심부름을 시키기에 딱 좋다. 중1 때 그런 친구에게 걸려든 피해자는 학교가 너무 가기 싫었지만, 그보다 더 싫고 무서웠던 것은 학폭 피해를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설명하는 일이었다. 가해자는 영악한 아이였으므로 그를 표나게 때리지 않았다. 옷을 걷어야 확인되는 옆구리, 허벅지, 무릎 아래 조인트 같은 데를 때렸다. 심지어 『고문 기술』 같은 책을 읽으면서 주변 아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피해자는 가장 마지막까지 그 괴롭힘의 대상으로 남겨졌다.
이중 폭력에서 살아남은 생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
인류 역사에서 오래전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어온 장애인은 그 자신이 폭력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형제들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같은 처지에 내몰린다. 지적장애인 오빠를 두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놀림을 받고 무리에서 배척된 여자아이는 20대가 되어 수면장애와 우울증을 앓았으며 학교폭력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몹시 힘들 수밖에 없었던 점은 학교를 빠져나와 집에 가면 가정폭력을 직면해야 했고, 다시 가정폭력을 피해 학교를 가면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가해를 했던 것이다.
“옷을 못 입어서, 집이 거지같아서, 오빠한테 장애가 있어서 학교에서는 나를 조롱거리로 삼았고, 남들은 나와 짝꿍이나 조원이 되는 것을 꺼렸다. 이런 일은 수업 시간에도 그칠 줄 몰라, 선생님 눈을 피해 의자에 압정과 본드를 놓는 행동으로 나아갔다.”
특히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오빠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기에 피해 아이가 진 짐은 너무 무거웠다. 주변 어른들은 ‘착한 동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줬지만, 오빠 때문에 학교폭력을 당하고 오빠를 잘 못 챙겼다는 이유로 가정폭력을 당했기에 오빠를 원망한 나날이 많았다. 그래도 이 아이는 선생님만은 내 편이 돼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학교의 왕따와 가정폭력을 솔직히 기록한 일기장을 읽은 선생님은 별말 없이 ‘참 잘했어요’ 도장만 찍어주셨다. 과연 담임선생은 아이가 당하는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을 알지 못했을까.
다섯 명의 피해자는 그래도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고 현재 자기 삶을 역량껏 꾸리고 있다. 하지만 한 명만은 피해 사실을 자기 목숨을 담보 삼아 알렸고,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2011년 12월 20일의 일이다. 아이의 엄마 임지영씨는 그날부터 ‘대구에서 학교폭력 때문에 자살한 중학생 권승민군의 엄마’로 불린다. 아들은 중2가 되면서 새 친구들을 만나 컴퓨터 게임을 같이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 부탁으로 아이템을 대신 키워주다가 아이템을 도난당하는 사건이 생겼고, 그때부터 동급생(가해자)들로부터 금전적인 배상을 하라는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 폭력은 강도를 더해 신체폭력과 언어폭력으로 이어졌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2011년 한겨울의 어느 날 아이는 가족에게까지 위해를 가하겠다는 가해자들의 협박을 받으면서 자신이 살던 집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저버렸다.
아이의 엄마인 임지영씨는 그 자신이 고등학교 교사이기도 해 자녀의 죽음 이후에도 이를 상기시키는 학교라는 곳에 매일 출근을 해야 한다(하지만 교사로서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녀는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알지 못한 채 아이를 낳고, 학교에 보냈다. 나는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울지 않았고, 가슴속으로만 절규하며 지내왔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녀는 사건 이후 10년 동안의 일기 뭉치를 꺼내놓는다. 잘 울지 않는 그녀는 일기에서 울고, 가해자들의 사과 없음에 원통해하며,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녀가 현재 죽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기록이기 때문에 계속해나간다.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만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든데, 가해자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데다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내리는 판단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극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쉽사리 ‘용서’라는 말을 꺼내고 쉽사리 ‘냉정’하다는 딱지를 갖다 붙인다. 임지영씨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들의 유서를 언론에 공개했고,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학교폭력의 중대성을 알리는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