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카뮈, 칼비노, 망구엘, 쿳시, 마텔 등이 추천한
20세기 이탈리아 환상문학의 고전
“잊히지 않도록 후세대가 지켜내야 할 이름들이 있다. 단연코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디노 부차티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20세기 현대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Dino Buzzati, 1906~1972)는 무엇보다 여러 작가로부터 희한한 대작 『타타르인의 사막』(1940)과 기막힌 단편들을 쓴 작가로 각인되어왔다. 일례로 이 작품에 영감받아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 M. 쿳시는 한번 읽으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색다른 고전 소설”이라 했고, 이탈로 칼비노는 “소설의 진정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작품”이라 했으며, 얀 마텔은 “신기루처럼 빛을 발하는 소설”이라며 극찬했다. 그만큼 독자에게 몽환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대표작 『타타르인의 사막』은 마술적 사실주의에 속한 20세기 환상문학의 정수로서, 1976년 발레리오 주를리니가 영화화하기 전까지 여러 작가와 영화 거장(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데이비드 린, 루키노 비스콘티 등)을 매혹했다.
디노 부차티는 한국에서도 그간 이어령, 김현, 서영은 등 문인들의 독서 노트에서도 줄곧 언급되어왔다. 이 소설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의 위험이 언제 닥칠지 모른 채 미래의 영광을 상상하며 ‘희망의 대기실’과도 같은 요새에서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보내는 병사들은 오늘날 기후, 환경, 경제, 보건, 정치 등 각종 위기에 맞닥뜨린 채 일상을 영위해나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밀리언셀러 『블랙 스완』의 ‘희망의 대기실에서 살다’라는 한 장에서 저자가 미래 위기와 대처와 관련해 『타타르인의 사막』이 전해주는 가치를 말하듯, 이 책이 지닌 고전의 가치는 다방면에서 인간과 운명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데 어떤 통찰력을 제공한다. <르몽드>에서 ‘20세기 책 100선’으로 꼽은 이 명작은 연극이나 무용 텍스트로도 곧잘 각색되어 사랑받아왔다. 이탈리아에서는 1988년 디노부차티국제협회가 설립되었고, 2016년 작가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가 있었다.
고립무원의 요새에서 아무도 모르는 적을 기다리는 한 병사의 부조리한 세계
“더는 이 초막 같은 요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울한 친구여. 당신처럼 다른 많은 이들이 너무나 오래 희망을 고집해왔다. 시간은 당신들보다 훨씬 빨랐고, 당신들은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 _본문에서
『타타르인의 사막』은 총 30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군사학교를 막 졸업한 조반니 드로고가 ‘타타르인의 사막’이라 불리는 넓은 평원을 마주한 북부 국경지대의 바스티아니 요새로 파견되어, 평생에 걸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가상의 적군을 기다리며 펼치는 이야기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군대의 일상과 한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 평원, 그 국경지대에서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 존재 이유는 오직 무감각한 지평선 너머에서 여기로 언젠가 진군해올 적뿐이다. 북방의 이민족은 신비에 싸여 있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소문만 있을 뿐 그 실체가 모호하다. 누군가는 이 요새의 환상을 깨닫고 떠나고, 누군가는 이 지루한 희망 고문 속에서 자신의 포부를 고수하다 죽으며, 누군가는 실수로 아군의 총에 맞아 죽는 전쟁 없는 전쟁태세 세계. 이 요새의 마법에 사로잡힌 군인들과 더불어 천천히 늙고 병들어가는 드로고는, 마침내 적이 왔을 때 새 병사들로부터 요새에서 쫓겨나, 어느 무명의 여관에서 “봄밤의 가벼운 회오리”처럼 찾아든 인생 최후의 적 죽음을 맞는다.
이 작품 발표 당시, 이탈리아는 1차대전이 끝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하에서 이 파국의 체제에 저항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안팎으로 굉장히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기였다. 이런 대기 속에서 나온 이 소설은 삶과 죽음, 인간 실존의 문제와 끝없는 무無의 세계에 관한 알레고리를 명징하고 생생한 문체로 드러낸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작가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누가 적이고 그 적이 실로 있기나 한 건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부조리한 세계에 볼모처럼 잡힌 불안한 인간의 운명은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미혹과 실수와 고뇌로 얼룩진 한 편의 우화 같은 악몽으로 화한다.
화가 부차티의 전력이 담긴 표지, 시간과 욕망과 꿈의 마지막 스케치
부차티는 “기자와 작가를 취미로 하는 화가”라고 자신을 일컬은바, <코리에레 델라 세라>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도 여러 그림과 만화를 그리고 무대미술가로도 활동했다. 훌륭한 재능 덕에 이탈리아 최초의 그래픽노블로 불리는 독특한 책 『만화 시집』(1969), 2019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화제가 된 삽화작품집 『시칠리아의 유명한 곰 습격사건』(1945)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의 표지로 쓰인 그림 역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밀라노 두오모 광장>이란 제목하에 1950년대에 발표했다.
시각적 이미지를 눈에 선하게 그려내는 묘사력은 이 작품 속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요새 안팎을 휘감는 시간의 속도와 꿈속의 수수께끼 카드처럼 넘어가는 매 장면의 밀도는 읽는 이로 하여금 단번에 이 신기루 같은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30장에서 아무도 몰래 적요한 고통 속에서 외로이 사투를 벌이며 죽음을 맞는 드로고의 모습은, 죽음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아는 인류 전체의 뇌리에 진정 감동 어린 소용돌이를 남긴다. 그는 과거의 욕망과 현재의 고뇌 속에서 미래의 진정한 인간으로서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던 참된 군인으로서의 영광을, 존엄을 다한 인류 최후의 보루를 지킨다. “과거의 일들이 숨어 있던 씁쓸한 심연에서, 부서진 욕망들에서, 그가 겪은 아픔과 상처들에서, 그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어떤 힘이 올라왔다... 조반니는 기운을 내어 가슴을 조금 펴고, 한 손으로 군복의 목깃을 정돈한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창밖으로 향하고, 자신의 마지막 몫인 별들을 보기 위해 아주 짧은 눈길을 던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무도 그를 보지 않지만, 그는 미소짓는다.”
【추천사】
“잊히지 않도록 후세대가 지켜내야 할 이름들이 있다. 단연코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디노 부차티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소설의 진정한 즐거움을 독자에게 안겨주는 이 소설은, 아무런 제약 없이 빠져들 수 있는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더는 모험을 감행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오늘날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사건들로 밝히고 있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고립된 삶이 어떻게 생명력 있는 우리의 영혼을 잠식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완전한 무無만이 영웅적인 행위를 축복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_이탈로 칼비노
“『타타르인의 사막』은 하나의 악몽이자 실수 연발 코미디, 아름답고 고뇌에 찬 우화다. 인간으로 남기 위한 우리 일생의 투쟁을 최후의 행위로 정당화할 수 있는 감명 어린 확신이다.” _알베르토 망구엘
“신기루처럼 빛을 발하는 이 멋진 명작은, 일었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야망과 인정사정없이 우리를 갉아먹는 시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조반니 드로고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빠져들겠는가.” _얀 마텔
“뇌리를 떠나지 않는 희한한 소설, 색다른 고전.” _J. M. 쿳시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부차티의 세계는 미로 같은 방식의 우회로로 가득하다. 인간이 처한 시간과 공간의 교차로는 이동하는 세계로서 무한대로 색색이 얼룩진 벽들로 둘러싸인 감옥과도 같은 영역으로, 바로 타타르인의 습격을 하루하루 살피는 요새가 이런 곳이다. 실제로 타타르인이 있는지, 예전에는 있었는지, 자신들의 눈과 생명을 다해 지평선을 훑는 이 사막에서 다급히 들이닥치게 될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_마르셀 브리옹(문예비평가, 역사가, 소설가)
“『타타르인의 사막』은 카프카의 『성』과 확실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더 평온한데다 보다 즉각적으로 일독의 가치를 전해주는 책이다.” _타임스
“걸작을 손에 쥐는 일은 흔치 않다. 한데 『타타르인의 사막』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숭고한 책, 대작이다. 부차티는 문자언어의 대가다.” _선데이 타임스
【본문 맛보기】
이제 보다시피 어린 시절의 작은 왕국은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어머니는 그가 돌아와 다시 그곳을 찾을 때까지 그 세계를 그대로 보존해둘 것이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후에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소년처럼 지낼 수 있도록. 아! 어머니는 분명 영원히 사라진 행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고, 도망치듯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둘 수 있다고 믿고 있을 터였다. 나중에 아들이 돌아와 집 문과 창문을 다시 열면 모든 게 전처럼 되돌아오리라 상상하면서.(10쪽)
아, 얼마나 더 먼 길을 더 가야 하는가. 앞으로 몇 시간이나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다 그의 말은 이미 지쳐 있었다. 넋이 나간 드로고는 요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람이 닿을 수 없으리만치 저토록 세상과 동떨어진 저 고독한 성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저곳엔 어떤 비밀들이 숨어 있을까? (13쪽)
나지막한 성벽에 둘러싸인 바스티아니 요새는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그림 같은 탑과 보루를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주변의 황량함을 달래주고 삶의 달콤한 면들을 상기시킬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전날 저녁만 해도 협곡 아랫녘에서 드로고는 요새의 모습에 매료되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환희가 일어나지 않았던가.(26쪽)
이제 드로고는 북쪽 세계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버려진 황무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적이 온 적도, 전쟁이 일어난 적도 없는 곳.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곳이었다.(39쪽)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모든 게 잠의 세계로 빠져든 듯 보이는 동안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여러 군인이 깨어 있었다. 드로고는 생각했다. 그 수십 명의 군인들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얼 위해 그런 수고를 마다않는가? 요새의 군사체계가 광기 어린 걸작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을 산길을 지키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라니. 떠나자, 되도록 빨리 떠나자. 이 대기, 안개 낀 이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 떠나자.(45쪽)
어른거리는 석유램프 불빛에서 벗어나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조반니 드로고는, 자신의 삶을 곱씹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잠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60쪽)
어느 순간 뒤에 있던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눈 깜짝할 새에 빗장이 걸린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조반니 드로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빠진 채 아이처럼 꿈을 꾸며 미소짓고 있었다.(62쪽)
바람이 길게 내려오는 물줄기를 흔들고, 메아리가 수수께끼 같은 놀이를 벌이는가 하면, 물에 부딪힌 바위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면서 끊임없이 말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이해를 갈구하지만 결코 그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삶의 말들이었다.(96쪽)
그래도 시간의 조용한 박동은 점점 더 빨리 삶의 운율을 재촉하며 흘러갔다. 잠시도 멈춰 있지 못할 뿐 아니라 뒤를 흘낏 쳐다볼 새도 없다. ‘멈춰, 멈춰!’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사람도 계절도 구름도, 모든 게 달아나버린다. 암벽에 매달리고, 바위 꼭대기에서 버텨봤자 소용없다. 지친 손가락이 벌어지고, 팔은 힘없이 늘어진다. 느리게 흐르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저 강물에 늘 휩쓸려갈 뿐이다.(234쪽)
망원경으로 적들의 모습을 본 순간 드로고는 어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소용돌이가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정신을 잃은 그는 인형처럼 난간에 늘어졌다. 시메오니가 때마침 그를 붙잡았다. 의식이 없는 그의 몸을 똑바로 세우면서, 그는 군복 너머로 드로고의 야윈 뼈대를 느꼈다.(263쪽)
시간의 흐름은 깨진 마법처럼 멈춘 듯 보였다. 근래 들어 점점 더 강하게 휘몰아치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세상은 무감각한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시계는 부질없이 움직였다. 드로고의 길은 끝났다. 이제 그는 어느 단조로운 잿빛 바다의 외로운 해안에 있었다. 주변에는 집도 나무도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태곳적 시간부터 그러했다.(277쪽)
세상에 홀로 남아 병들고 요새에서 버려진 남자, 모두에게서 뒤처진 소심하고 쇠약한 그 남자는,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라고 용기 내어 상상했다. 어쩌면 일생일대의 기회, 그의 전생애를 가치 있게 만들어줄 결정적인 전투가 정말로 닥친 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278쪽)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드로고. 괴로움은 지금으로 충분해. 가장 큰 고통은 이미 겪었어. 설사 고통이 너를 덮치고, 너를 위로해줄 음악이 더이상 없으며, 지극히 아름다운 이 밤 대신에 역겨운 안개가 오더라도, 결국에는 똑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어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지났고, 무엇도 더이상 너를 속일 수 없어.(2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