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맞이한 ‘소속 없음’ 처음 눌러본 ‘일단 멈춤’
어쩌면 찬란한 방황을 위한 인터미션 타임
어디로든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우리는 차근차근 삶의 단계를 따라 밟습니다. 이 지구에서 이번 생을 살아보는 것이 처음이라서, 앞서 간 어른들의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죠. 1단계가 지나면 2단계로, 2단계가 지나면 3단계로 또 다음 단계를 향해서요. 다들 가니까 당연히 가야 하는 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 또한 맞이합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요’ ‘가라는 곳으로 갔는데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오는 거죠. ‘이게 다 네가 선택한 거잖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도 반드시 옵니다.
아니, 이게 전부 다 내가 선택한 거라고요? 이거 실화인가요?
자 이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순간에,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불안’이라는 말로 아우를 수도 있겠네요. 불안의 시기. 계속해서 동전을 넣어가며 이번 판을 클리어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던 인생의 한 시기. 살던 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과 떨림. 대학을 졸업한 후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인기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저자는 그 시간을 지나는 방법으로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방황의 기록을 이 책 『오라는 데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만』에 담았습니다.
하루 세 시간을 일하고 최저시급을 받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주어진 건 오로지 서빙할 때 입는 앞치마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크려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치킨집에 손님이 들어오면 크게 인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하고요. 어쩌면 ‘이 시대의 젊은이’로서 대담하지도 않고 진취적이지도 않은 선택을 했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소박한 한 걸음이면 어떤가요.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작은 시도에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데 말이죠.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걱정이 앞서죠.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고 취업 준비에 매진하는 게 어떻겠니?’라며 염려하고, ‘힘들면 그만둬도 돼. 아빠가 벌잖아’라고 다독이기도 합니다. 그 자신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이틀쯤 아르바이트를 쉬고 취업 준비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쳐지나갈 때도” 있고, 친구들과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제껏 인생은 사지선다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살아가면 갈수록 나만의 정답을 찾아가야겠다는 희끗한 확신이 듭니다. 더불어 이 책은 객관식 답안을 벗어나 써내려간,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대한 그의 첫 답안지이기도 하죠.
“불안으로부터 얼른 도망치려면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 움직임은 반드시 ‘사람을 향한 몸짓’이어야 한다.” _ 이병률(시인, 여행작가)
학창 시절을 지나 치킨집 아르바이트생으로 새 문을 연 그는 이내 새로운 ‘작은 사회’를 경험합니다. 환한 낮에도 왜 치킨집은 불을 켜두는 걸까? 가장 인기 있는 메뉴와 내가 좋아하는 메뉴 중 손님에게 어떤 것을 추천할까? 손님이 치킨을 왜 남겼을까? 맛이 없어서였을까? 식기세척기도 가끔은 전원을 끄고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여러 질문들이 생겨나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도 찾아갑니다.
이 작은 사회에서의 발견은 저자가 속한 삶으로도 폭을 넓힙니다. 그가 치킨집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을 친근하게 기억하듯 그 역시 자주 가는 미용실의 단골이기도 하며, 그가 치킨을 담아낼 그릇을 준비하고 꾸미는 수고를 더하듯 자주 가는 음식점에서 친구들이 ‘인증샷’을 남기는 모습도 포착합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아는 동생이 SNS에 사진과 함께 올린 ‘추억을 팔아 추억을 산다’는 문장을 기억해내기도 합니다. 그런 소중한 순간을 발견하고 간직하는 것은 이력서에 쓸 수 없더라도 분명히 그의 특기이기도 하죠.
낮에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취업 준비를 하고 가끔 밤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홀로 산책을 나가 사색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내어놓고 ‘심심하고 쓸쓸하게’ 끊임없이 걸어나갑니다. 다음 단계로 올라서기 위한 행위가 아닌 ‘일단 멈춤’의 상태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채 같은 층의 무빙워크 위를 계속해서 걷고 있는 겁니다. 올라가지 않았다고 해서 어떻게 이 움직임이 성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끔은 세대론이 낯설게 들립니다. ‘청년층’ ‘밀레니얼세대’ ‘90년대생’ ‘무민세대’ ‘Z세대’ 같은 말들로 그를 포함한 또래 친구들을 여러 카테고리 안에 밀어넣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런 소속은 필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익은 펜을 찾아 들고 자신의 획과 서체로 힘있게 자신만의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으니까요. 색깔로 치면 “아주 희지도, 아주 검지도 않은 것이, 가장 극단적인 두 색의 중간이라면 중간일 어느 지점에서 서로 몸을 섞고 있는 느낌”의 회색 정도가 좋습니다.
이 움직임은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요?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시기를 지나온 혹은 지나고 있는 우리들 역시 나에게도 불안의 시기가 있었지 생각하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에겐 그 흔들림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도요. 자, 이제 낯설게 다시 불안을 마주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요. 별수 있나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움직이는 수밖에. 그 방향에 꼭 ‘당신’들이 함께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