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를 하듯 꼼꼼하게 준비했지만,
여행은 언제나 예측 불허!
건축가 가족이 떠난 좌충우돌 유럽 여행기
“‘여행’이라는 말만으로도 우리는 마음이 설렌다. 어느 방송에서 물건을 소비하는 것보다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더 크고 더 오래가는 행복감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여행이라는 경험을 소비함으로써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또 행복감을 느끼게 하며, 여행에서 정리된 생각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거창하게 인생을 논하지 않더라도 여행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큼은 확실하다.”-「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건축가가 아내와 초등학생 딸과 함께 유럽으로 12일간 여행을 하고 돌아와 낯선 장소에서 경험한 소중한 기억을 꼼꼼하게 기록한 여행 에세이다.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 바쁜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장기휴가의 기회를 얻어 가족과 함께하는 첫 유럽 여행을 계획한다. 맨 처음 여행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부터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12일간 부지런히 보고 듣고 느꼈던 여행지에서의 경험, 여행을 다녀온 후의 감상까지, 지은이가 간직하고 있던 설레고, 당황하고, 그럼에도 매순간 즐거웠던 기억들이 기승전결의 구성을 충실하게 담아낸 한 권의 여행서로 탄생했다.
이 가족의 여행은 파리에서 시작해 런던과 베네치아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으로 꾸려져 있다. 하고 많은 유럽의 도시들 가운데 세 곳을 목적지로 정한 데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파리는 막연하게 에펠탑을 보고 싶어 하는 딸아이의 소망을 반영한 곳이고, 런던은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가 유학 시절에 지내던 장소다. 베네치아는 12년 전 지은이가 참가했던 베니스 비엔날레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지은이는 이처럼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 꿈꾸거나, 사연이 있는 장소를 찾아가 당시의 기억을 교감하고 새로운 추억을 쌓고자 세 도시를 목적지로 삼은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지은이는 “추억이 담긴 장소는 개개인에게 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한 유산이 된다”고 썼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의 사연이 담긴 장소를 함께 찾아 서로가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은이가 찾은 파리, 런던, 베네치아, 이 세 도시는 그저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유명 관광도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장소인 셈이다. 책을 통해 지은이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다보면 더욱 풍부하고 새로워진 여행의 레퍼토리를 만날 수 있다.
여행지에서 작동하는 건축가의 시선,
건축가의 눈으로 바라본 유럽 건축
책에는 단순히 가족여행의 에피소드만 담겨 있지 않다. 직업이 건축가이다보니 가는 곳마다 건축물, 도시 계획 등 직업적 시선이 자연스레 작동해 가족여행의 새로운 레퍼토리를 제공한다. 도시의 상징이 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비롯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박물관과 성당,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는 주택가, 또 도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도로와 가로, 골목에 대한 이야기까지…. 책에는 지은이가 직접 보고 느낀 유럽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 그린 스케치, 특징을 포착한 사진들과 함께 생동감 있게 실려 있다. 때로는 입담 좋은 가이드의 설명처럼 현지에서 건축물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하듯 생생함을 전해주고, 때로는 진지하게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견해를 들려주기도 한다.
특히 파리와 런던, 베네치아라는 세계적인 도시에서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건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파리의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의 피라미드 구조물에서는 과거에 혹평을 받던 건축물이 오늘날에는 도시를 대표하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상징이 되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런던에서는 밀레니엄브리지와 테이트모던, 그리고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초고층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춰 미래를 대비하는지 들여다본다.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에서는 산마르코광장과 산조르조마조레성당의 종탑에서 바라본 석양의 황홀함을 경험하고, 도시의 독특한 자연환경이 건축물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유럽의 주거 공간에 대한 지은이의 세심한 관찰도 이 책의 특징이다. 책 속에는 여행지에서 묵었던 숙소를 분석한 내용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다. 여행지에서 숙소는 그저 며칠 묵어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책에는 이처럼 ‘숙소 분석’ 페이지를 따로 마련하여 각 도시에서 묵었던 숙소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도시별 주거환경의 특징을 발견한다. 호텔은 물론이고 일반주택을 개조한 숙박시설까지 두루 이용한 덕분에 그 도시의 주거지가 품고 있는 특징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며, 숙소의 주변 환경, 외관과 내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직접 그린 도면을 더해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 말미에 수록한 ‘꼼꼼한 여행 준비’는 여행 계획 단계부터 ‘숙소-교통-안전-볼거리-즐길거리’ 등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어 앞으로 가족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들의 수고를 덜어준다.
“레퍼토리가 풍요로운 인생은 아름답다”는 지은이의 말처럼 이 책으로나마 특정 장소의 고유한 매력을 전하고, 즐거웠던 여행의 기억을 공유하며, 언젠가 다시 여행이 자유로워지는 날을 고대하며, 함께 꿈꾸고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