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지식인의 미의식에 깔린 매화 사랑
옛 선인들은 봄철 스물네 번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차례로 꽃이 피어난다고 여겼다. 따라서 봄철에 들려오는 꽃 소식을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 불렀다. 24절기 중 소한에서 곡우에 이르는 120일 동안 바람이 불 때마다 차례로 스물네 개의 꽃이 피는데, 이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꽃이 바로 매화다. 예로부터 매화는 꽃 가운데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 봄이 온다는 것은 단순한 기후 변화가 아니었다. 춘하추동 사계의 순환에 음양이라는 우주 가치의 순환을 개입시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양을 위주로 한 존양尊陽의 논리에서는 봄의 도래에 심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때문에 동지에 해당되는 복괘復卦를 양이 태동하는 지점으로 보고, ‘태극太極’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매화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 뒤 수·당을 거치면서 매화는 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글의 제재로 등장하는데, 특히 성리학이 확립됐던 송대에 이르러 매화가 더욱 중시되며 매화시 창작이 성행한다. 이러한 흐름에 천고의 절창으로 칭송받는 명편을 쓴 임포의 매화벽이 더해져 많은 시인이 매화를 향유하며 그 품격이 높아졌다. 송대에는 매화를 사랑하여 그 운치를 노래한 문인 학자가 많이 등장했고, 이는 중국의 성리학 형성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에 유가와 성리학을 그대로 수용했던 조선 문인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설매를 찾아다니고 분매를 가꿨던 문인의 매화 향유 방식을 살펴보다
매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천기天機가 드러남을 완상하며 꽃송이 하나하나가 태극임을 즐기는 이들이 있으니, 주염계와 소옹 같은 여러 현인이 그들이다. 저 고결하며 맑고 차가운 운치를 취하여 지기라 여기며 즐기는 자들이 있으니, 임포의 무리가 그들이다. 참된 빛깔을 감상하고 맑은 향기를 취하여 시흥을 북돋우며 즐기는 자들이 있으니, 시인과 묵객이 그들이다. 나라에 으뜸가는 미색을 가까이 두고 풍류를 견딜 수 없어서, 금빛 휘장을 걷어 올리고 고주羔酒를 따르며 즐기는 자들이 있으니, 공자公子와 왕손이 그들이다. 눈 속에서도 봄을 누리고, 잎이 없는데도 꽃이 핀다고 기이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으니, 평범한 사내들의 속된 안목이 그러하다.
(/ ‘김창협의 [삼연집]’ 중에서)
문인들의 매화시를 자세히 읽다보면,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매화를 취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기를 감상하며 태극의 이치를 꿰뚫는 주염계나 소옹 같은 성리학자가 있고, 고결하고 차가운 운치를 보며 참된 친구로 여기는 임포 같은 은자가 있다. 매화의 빛깔과 향기를 즐기며 시흥을 돋우는 문사가 있고, 미색을 끼고 금빛 휘장 속에서 귀한 술을 마시며 즐기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눈 속에서 봄소식을 전하고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사실을 신기해하는 범부도 있는 것이다.
분에 올려 가까이 곁에 두는 분매盆梅,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 두어 감상했던 감매龕梅, 병에 꽂아 즐겼던 ‘한 점의 천기’ 병매甁梅와 문회文會의 찾아온 손님인 얼음등 앞의 빙등조매氷燈照梅, 꽃에서 나온 밀랍으로 다시 꽃으로 윤회했다 하여 이름 붙여진 윤회매輪廻梅까지 매화를 곁에 두고 즐기던 모습은 문인마다 가지각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같은 매화를 보고도 다른 마음을 가진 이들은 바로 눈앞에 매화를 보는 듯 풍경을 시로 그려냈다. 또한 꽃을 항시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종이와 도자기 위에 망울을 터뜨린 매화를 그려넣고 곁에 두기도 했는데, 이는 매화가 조선시대 예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매화시에 그려진 조선 문인의 내면 풍경을 읽다
18세기 동인 집단의 매화시 창작 흐름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매사 동인들이 일곱 차례에 걸쳐 시회를 열고 200수에 이르는 매화시가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8세기 서울에서 분매 완상의 풍조가 극성한 시대 분위기가 조성된 덕분이다. 많은 매화시가 쏟아져 나온 덕분에 우리는 시대와 방법, 매화의 종류에 따라 등장하는 사대부 문인의 내면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지향까지 감지할 수 있다.
문인들은 하얀 눈 사이에서 굳세게 피어난 설중매를 보기 위해 추운 겨울 산도 마다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 가장 먼저 피어난 매화는 보는 사람의 가슴속 사악한 기운을 씻어주는 청진한 존재였다. 또한 서재에서 매화를 거울에 비추어보며 색즉시공의 이치를 떠올리고는 이에 비유하여 시를 짓기도 했다. 또한 꽃에서 나온 밀랍을 다시 꽃인 매화로 탄생하는 순환의 이치를 불교의 윤회설에 빗대어 ‘윤회매’라 명명하고, 그와 관련된 시에는 윤회의 이치에 중점을 두고 시상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문인들에게 매화는 불교 신앙과 관련해서도 애호의 주된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빛 아래 피어 있는 매화를 보며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리다 잠이 들고, 집에 직접 공간을 꾸미고 매화가 피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고지식한 사대부들이 왜 스스로를 ‘매치梅癡’라 칭했는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처럼 조선 문인들이 매화를 사랑한 이유는 단지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고, 매화가 지닌 성격과 그를 대하는 문인의 성리학적·불교적 인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조선 초 생육신으로서 습득한 지식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았던 김시습의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그에게 있어 매화는 단순히 기르거나, 감상하거나,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찾아가는 대상’이었다. 매화의 참모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 기준이나 사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진정하고도 간곡한 관심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김시습은 매화의 참모습을 느끼기 위해서는 방 안이나 뜰에 있는 분매, 정매가 아니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지매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야 한다고 여겼다. 김시습의 이러한 태도는 탐매시가 많은 이유를 적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중앙의 관학적 아카데미즘 전통을 물려받기를 거부하고 성리학의 토착화와 출세주의·공리주의를 떠나 올바른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삼았던 성리학의 대표 주자 이황은 자신의 시심을 매화와 묻고 답하는 것으로 달래곤 했다. 그에게 매화문답시는 매화를 친구처럼 대해 출처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며 ‘진은眞隱’의 삶을 희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매화와 사랑에 빠진 선인들의 연서와 같은 매화시를 읽다보면 눈과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매화가 저절로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다른 어떠한 봄꽃보다도 매력적인 꽃, 매화에 담긴 조선 문인들의 정신은 단순히 절개와 지조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며 다채로운 시상으로 꽃피워졌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매화시에 담긴 풍경을 세세하게 읽어 나간다면,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날의 길을 절창을 쓴 문인과 함께 산책하는 기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