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마련한 두번째 작품집
『기차, 기선, 바다, 하늘』은 1978년 홍성사에서 출간된 이제하의 두번째 창작집이다.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로 하였으나 검열로 인하여 유보되어 있던 「비원」을 포함하여 총 9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991년 전원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던 『기차, 기선, 바다, 하늘』은 작가의 새로운 수정을 거쳐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이제하 소설전집 두번째 권으로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기발하면서도 엉뚱하다 싶을 정도의 도입부로 발표 당시 문단에 충격을 던져준 표제작 「기차, 기선, 바다, 하늘」을 비롯하여 일탈의 욕망과 광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자매일기」, 이제하 특유의 상상력을 통하여 환상에 사로잡힌 이야기 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는 「환상지 3」 등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그의 작품들은 우리 소설문학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무력감으로 휩싸인 삶의 비극성에 대한 집요한 묘사
7, 80년대의 문학작품들이 현실의 정치적 상황을 그려내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리얼리즘의 문제를 부각시킬 때 이제하의 소설이 보여준, 그 스스로 ‘망상’이라 부른 환상적 상상력의 세계는 오히려 더욱 치열한 리얼리즘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지는 환상과 상상력의 세계는 개인이 겪는 현실의 악몽과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부세계에서 가해지는 폭력과의 대치가 아닌 개인에게 심어진 현실의 상황에서 비롯된 자아의 광기와, 어떠한 해결점도 찾을 수 없는 무력감에서 시작된 자기파괴의 욕망이 잔인하리만치 집요하게 묘사되고 있다.
4·19혁명을 거쳐온 남자가 술과 여자에만 탐닉하는 무력한 치한으로 변모해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난 「자매일기」나, 낯선 남자가 누이동생과 정사를 벌이는 근친상간의 끔찍한 현실 앞에서 잠 속으로 빠져들기만 하는 「기차, 기선, 바다, 하늘」이나, 누드 모델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심약한 색맹의 미술학도가 등장하는 「물의 기원」에서 보여지듯이 이제하 소설의 인물들은 무력하고 동시에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경호는 “이제하의 소설에서 고요함은, 혹은 내면화는 공포를 견디면서 타인과의 결속을 도모하는 가장 효과적인 삶의 자세로 상찬을 받는다.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공포를 주체적으로 내면화하지 못할 때 자기파멸의 광기를 과시하거나 자포자기의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그 삶은 비극적이다. 이제하의 소설은 그러한 삶의 비극성을 묘사하는 데 장기를 발휘한다”고 이제하의 소설을 평하고 있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악몽과도 같은 억압 속에서 결국은 무력하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내면에 자리한 광포함과 자기포기의 대응방식은 이제하가 표현해내는 환상적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더욱 절절하게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그의 특이성이란 상투적인 삶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조야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증오의 테마가 갖는 진지성에도 있지만, 안이한 독자들을 강압하는 충격적인 방법론에서 더욱 탁월하게 나타난다. 이제하는 전통적인 소설작법과 통념적인 서술방법을 깨뜨리고 시적 상징과 초현실적인 암유를 혼유시켜 마치 쉬르 화가의 그림처럼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도치된 형태의 묘사로 인간의 속물 근성 속에 내포된 허위와 비굴을 포괄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이제하의 작품세계를 말하고 있다.
‘예술가 소설’로 자리매김한 예술의 본령과 의미에 대한 탐색
또한 이번 작품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예술가소설’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비원」이다. 검열로 인하여 유보되어 있다가 『기차, 기선, 바다, 하늘』에 수록되면서 선보이게 된 이 작품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던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예술가의 반응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비원이 무섭다”고 말하던 화가 동운은 그가 무서워하던 권력의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맞는다.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의 비원이지만, 왕조 권력의 상징이었던 그곳에서 자행된 폭력과 살생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해낸다. 하지만 육이오라는 비극의 전쟁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양쪽 권력자의 초상화가 필요에 의한 명분으로 마음껏 탈바꿈되면서 동운은 무력하게 하나의 희생양으로 죽음을 맞는다. 누대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이 자행되는 권력의 무자비한 힘 앞에서 예술가란 무력하게 위치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의 비극을 통해서 이 작품은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현실의 폭압 앞에서도 그 본령을 자리매김하려 하는 작가의 집요한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경험이 작가의 무의식 깊이 영향을 미쳐, ‘환상적 리얼리즘’ ‘초현실주의소설’ ‘심리소설’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제하의 작품세계에, 분단이라는 한국문학사에 있어 가장 커다란 주제가 포함될 수 있었다는 의의도 함께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