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골목들을 산책하며 도시공간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 사회학자 정수복과 그의 아내 심리학자 장미란 부부가 파리의 생활과 여성에 관한 책을 각각 내놓았다.
일상과 관계의 폐허에 갇혀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시기, 정수복은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가 사는 자리를 옮긴 곳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자 정신적 망명지가 되어준 파리이다.
이 책에는 그가 한국에서 사회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느닷없이 파리로 ‘정신적 망명’을 떠나 생활과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 분투한 날들의 일기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같은 시기 출간된 아내 장미란의 『파리의 여자들: 파리지엔느의 내면 읽기』가 자신이 아닌 프랑스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파리지엔느들의 삶과 내면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과 심리를 분석한 책이라면, 남편 정수복은 자신의 내면과 일상을 끝까지 좇으며, 한국인이 파리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속속들이 담아낸다.
나는 지금 이곳에 혼자 있다. 파리의 한구석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은둔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속의 땅과 지금까지 관계 맺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떠나는 의도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이다. 은둔은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곳에 대한 혐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부정에서 출발한 은둔은 또다른 긍정을 추구한다. 은둔은 단지 세상을 피해 다른 곳에 숨는 행위가 아니라 지금까지 세상에서 추구했던 것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다른 차원과 다른 단계의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상가와 작가들이 자기가 살던 사회를 떠나 익명성과 자유가 보장된 도시로 자발적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파리는 이방인 작가와 지식인들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작품을 위해 즐겨 찾는 도시이다. 파리의 공기는 작가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고, 파리의 거리는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파리의 카페들은 작가들에게 무언가 쓰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_본문에서
모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로움을 찾아나선 자의
1년간의 변신일기
그의 일기에는 그가 창작자로서 느끼는 고뇌와 열망, 새로운 정착지에서 살아내야 하는 생활인이자 가장으로서의 고통이 교차한다. 지금까지 그가 산책자로서 파리 골목마다 숨은 아름다움과 역사를 발굴해냈다면, 이번 책에서는 파리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적응하고 책임져야 하는 이의 무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새로운 것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느껴진다. 걷고 사색하고 매일 쓰면서 그는 때로 오해받고 때로 불화했던 한국에서의 삶을 넘어 이곳에서 ‘변신’하고자 한다.
2011년 말 파리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서울에서 취직도 안 되고 집안에 돈은 있어서, 파리에 가서 널널하게 지내다 온 사람’이라고 써놓은 것을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음을 알았다. 나 스스로는 파리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타인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파리 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한 이 일기가 내가 나를 보는 시선과 바깥에서 나를 보는 시선 사이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_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영감을 얻기 위한 파리 예술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가이드가 된다. 파리에서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프랑스 지식인들의 대담을 듣고 더 명료한 프랑스어를 단련하기 위해 공부하고 파리를 넘어 아를과 오베르쉬르우아즈 등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정수복의 여정과 활동은, 파리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새로운 모색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보석 같은 힌트들로 가득차 있다.
붙박이나 토박이가 아닌 파리와 서울 두 도시를 걸쳐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더 많은 것으로부터 자극받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정신적 망명객의 삶. 서울에 지쳐 파리로 넘어갔던 정수복은 그렇게 파리에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글쓰기 형식인 일기를 매일 써나가며 파리의 순간들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서 나 자신의 삶의 증인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낯선 나라에서의 망명 생활은 변혁운동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의 망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파리에서 ‘정신적’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망명 생활은 정치적 박해를 받아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망명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의 불화 때문에 스스로 택한 어떻게 보면 사치스러운 망명 생활이다. 지금 나는 ‘방법론적 단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끊고 모든 사회적 관계를 단순화시킨 상태에서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있다.
나의 자발적 망명 생활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활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참여하는 시민적 지식인 모델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지식인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나는 망명중이다. 나는 수련중이고 모색중이다. 과거를 다시 해석하면서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 결코 편안하지 않은 경계선 위에 서서 나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지금 이곳 생활의 목표다.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변신 그것이 나의 자발적 망명 생활의 화두다. 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