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이 자주 출몰했던 집에서 한 가문이 고통을 받았던 오래된 유령의 집 일화들이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먼지 쌓인 케케묵은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유령 목격담이 여전히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령 현상은 인류의 가장 오랜 오락이다.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사람들은 유령에 열광했다. 어떤 시대에 유령은 따분한 시골 저택의 유일한 얘깃거리였고, 오랫동안 가장 믿을 만한 돈벌이 수단이었으며, 전시에는 애국심을 추동하는 국가 신념이 되기도 했다. 출판물을 팔고 싶다면 유령 이야기를 쓰면 된다. 집을 시세보다 고가에 팔고 싶다면? 유령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집이라 선전하라! 가장 큰 상업 쇼와 사기극에는 유령이 빠지지 않았다. 언론과 출판을 발전시킨 것은 유령 이야기를 향한 대중의 열광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종교가, 때로는 국가가 유령을 믿도록 추동했다. 시대를 풍미한 유령 소동이 날조로 밝혀져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유령에 다시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학이 발달하면 유령 현상도 기꺼이 함께 진화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런 이야기들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유령이 함께해온 역사를, 한 번은 제대로 써봐야 하지 않을까?
유령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책의 저자 로저 클라크는 영국 심령연구학회 최연소 회원으로, 일찍이 고스트헌팅과 유령 현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에 눈뜬 소년이었다. 열한 살 때 아버지로부터 『영국의 민담, 신화, 전설』이라는 책을 선물받은 뒤 이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는 그는 유령을 실제로 보고 싶은 열망으로 유명 심령 스폿을 찾아다니고, 동시에 관련 책을 탐독하며 저자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유령을 봤다는 사람에 대한 책은 많지만 유령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책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는 수많은 유령 이야기와 관련 문화에 진지하게 접근하며 신중한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유령이란 무엇일까? 왜 어떤 유령은 산 자의 존재를 아는데 어떤 유령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까? 전혀 다른 성격과 목적을 가진 듯한 다채로운 유령 목격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유령은 대체 무엇일까?
유령의 정체가 무엇이든, 흔히 사람들은 유령이 우리에게 공포를 주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령은 그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영화 「디아더스The Others」를 보면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흔히 유령이라 부르는 존재나 현상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유령 이야기를 수집하고 조사하는 데 일생을 바친 피터 언더우드는 유령을 크게 여덟 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엘리멘털은 어딘가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악령이나, ‘물의 정령’과 같이 토속신앙에서 유래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어떤 장소에 웅크리고 있다가 때로 착란을 일으킨다. 유령이 출몰한다고 널리 알려진 오래된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것은 대개 엘리멘털이다.
할리우드 영화 때문에 잘 알려지게 된 폴터가이스트는, 물체의 비현실적 움직임과 소음 등의 현상이다. 특정 인물(‘초점인물’이라고 부른다)의 주변에서 물리력을 가진 에너지 형태로 나타나며 주로 특정 주택 안에서 일가를 괴롭히는 형태로 목격되었다.
좀더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형태의 유령은 죽은 자의 혼령으로, 산 자와 교류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위기유령이나 생사유령 또한 역사가 깊다. 이들은 실존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나 위기를 알리기 위해 유령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특히 전쟁 중에 많이 목격되었다. 그밖에도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된 날짜와 장소에 나타나 심령 현상을 일으키는 ‘정신적 각인 구현’ 형태의 유령이나, 산 사람의 유령, 타임슬립 형태의 유령 현상 등이 있다.
이렇듯 다양한 유령만큼이나, 유령을 겪는 사람들의 반응도 개인에 따라, 시간과 공간과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실제로 유령과 인간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종종 유령보다는 유령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좀더 흥미를 끌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학의 시대에 쓰는 초자연현상의 역사
대부분의 유령은 한 차례 목격된 후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목격담은 글로 기록되거나 녹음되지 않는다. 그 때문일까?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거창하고도 진기한 유령 이야기는 많지만, 제대로 된 구성을 갖추어 문화사적으로 해석할 만한 텍스트는 많지 않다. ‘유령’이라는 주제는 잘못된 정보를 지닌 사람들과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질적 저하를 겪어왔다. 이것이 저자가 책을 쓰게 된 이유다.
이 책은 유명한 유령 사건에 대한 문서를 종합해 그 전말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소개하는 동시에, 시대와 문화에 따라 이 담론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체감할 수 있도록 쓰였다. 유명한 유령에 대한 기록과 이를 겪은 이들이 품었던 혼란이 그대로 담겨 있고, 이것이 세간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흥미롭게 다룬다. 어떤 유령 사건의 전말은 끝내 미궁 속에 남았고, 어떤 경우 돈벌이를 위해 유령을 꾸며낸 이들의 트릭이 낱낱이 밝혀졌다. 속임수가 만천하에 밝혀지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유령 이야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유령을 향한 사람들의 열정은 놀랍도록 계속되었다. 시대가 유령은 비과학적이라 말하게 되었음에도 유령 목격담은 끊이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에 힘입어 고스트헌팅 장비가 개발·보급되었다.
세상은 변했고, 뇌의 화학 작용에 대한 신비가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 초자연 현상을 무시해오던 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유령에 대한 믿음과 민속학에 관심을 갖고 150년 전 중단했던 지점에서부터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이제 담론은 재개되고 있으며,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가 보고 겪게 될 수많은 현상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사랑해온 유령 이야기
시골 저택의 유령은 지역사회를 뒤흔드는 이야깃거리였고, 때로 유령 쇼와 강령회는 그저 크게 한탕 치고픈 이들의 돈벌이 수단이었다. 유령 현상을 꾸며내는 야바위꾼과 그 사업을 지원하는 저명인사들, 초자연현상 전말을 의심하고 파헤치고자 사력을 다했던 사람들과 이 유령 사건을 소비했던 대중의 열광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시에 목격된 유령 이야기는 전의와 애국심에 불을 지피는 미담이 되고, 이때 유령 현상에 대한 믿음은 국가에 의해 부추겨져 온 국민의 신념이 되기도 했다. 최신 유령 이야기를 읽으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아 온갖 형태의 인쇄물이 나왔으니, 언론과 출판을 발전시킨 것은 유령일지 모른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유서 깊은 대중오락인 유령 이야기를 총망라한 ‘유령의 문화사’다. 최근의 학술적 연구를 다뤘으며, 과학 발전을 중심으로 새로 발견된 사실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유령을 봤다는 사람들의 보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유령 존재의 유무가 아니다. 유령은 경험되고, 존재하며,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유령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우리가 유령을 경험했을 때, 그 유령이 무엇이었는지, 이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가 말한다. 유령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상대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조심스레 자신만의 유령 경험을 털어놓는다.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강렬하게 유령을 사랑해왔는지, 이 책을 읽는다면 독자들은 분명 놀랄 것이다.
책 속에서
초자연현상에 대한 집착과 유령 사업
프란츠 메스머는 1734년, 독일 슈바벤의 수목 관리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행성체가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법학과 의학을 전공했지만, 의학계에서는 그를 괴짜라고 여겼다. 1770년대, 메스머는 자석을 이용한 건강요법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람의 체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숨겨진 힘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기磁氣를 띤 돌멩이를 신체 위로 통과시키거나, 심지어 전문가의 손만 스친다면 그가 ‘동물 자기’라고 불렀던 힘을 소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메스머는 빈에서 한창 성공 가도를 걷다가 갑자기 추락한다. 그 중심에는 명성이 자자한 열여덟 살의 맹인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법원 공무원의 딸이었던 그녀는 살리에리로부터 음악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테레사 폰 파라디스Maria-Theresa von Paradis(1759~1824)였다. 그녀는 눈을 치료하기 위해 메스머의 집에 머물기 전부터 이미 18세기의 온갖 치료법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메스머가 동물 자기를 그녀의 옷섶에 너무 가까이 댄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는 이 소문을 감당할 수 없었다. 딸이 오명을 뒤집어쓸까봐 두렵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황후가 주는 생활 보조금이 끊길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딸이 시력을 되찾으면 보조금은 중지될 것이 분명했다. 폰 파라디스 부부는 메스머의 집을 급습했고, 딸이 그 집에 남겠다고 버티자 아버지는 칼을 휘둘렀으며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벽으로 내던졌다.” 깊은 우울증에 빠진 메스머는 빈을 떠나면서 그의 대규모 사유지를 처분하고 영업도 그만뒀으며 심지어 아내와도 영원히 이별했다. 보이지 않는 힘의 이용이 결국 부적절한 성적 관계에 대한 혐의로 이어진 것은 이 일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유령의 저속함에 대하여
유령을 보기 위해 군중이 모여드는 현상은 빈민가에서 가장 흔했다. 런던 남부 지역의 음산한 구역인 악취가 풍기는 무두질 공장과 먼지투성이의 옥양목 노동자가 많았던 버몬지에서는 주요한 유령 사건이 적어도 세 건 발생했다.
1868년 8월의 버몬지로 다시 돌아가보자. 템스 강에서 낚여 올라온 사체가 조사를 위해 세인트 제임스 교회 옆의 법정 시체 안치소에 이송되었을 때, 밤이면 이 시체가 벌떡 일어나 교회 안마당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 결과, 어림잡아 2000명은 되는 시민이 밤마다 교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교구 목사와 관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찰이 출동하자 19살의 제임스 존스는 철책 위로 올라가 수군거리며 동요하는 군중에게 외쳤다. “가지 마세요, 저기 또 보이네요, 저기 유령이 지나갑니다!” 그는 즉각 체포되었다.
유령을 둘러싼 소동은 지방에서도 벌어졌다. 1843년 2월, 선덜랜드 전역에 뉴스가 퍼졌는데, 머틀에 탑승했던 선원이 죽은 여동생의 방문을 받았으며 배가 한밤중에 정박해 있을 때면 그녀가 무덤에서 일어나 부두로 걸어온다는 내용이었다.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교회 안마당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유령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1845년 10월 노리치에서는 대부분 소년으로 구성된 400명가량의 사람이 모여, 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격된 유령을 찾아 나섰다고 『노리치 머큐리Norwich Mercury』는 보도했다. 1852년 10월에는, 헐스 웰링턴 거리에 있는 다세대 주택에서 신고가 들어온 유령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매일 밤 200~300명가량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다.
목사관 살인사건
1930년 10월부터 볼리 목사관에는 인부들이 머물렀다. 하지만 집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노동자들이 떠난 후,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마리안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낯선 성가집이 나타났다. 철물, 돌멩이, 실패, 지팡이, 석탄이 던져졌다. 극악했다고 손꼽히는 한 사건이 발생한 1981년 3월 28일, 마리안이 ‘흉물’이라고 묘사한 존재가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집에 퇴마술을 행하려던 시도는 악랄하게 쏟아지는 돌무더기로 끝이 났다. 결혼반지(주인을 알 수 없는)와 같은 물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부엌 식탁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것이 발견됐고 경첩을 고정해둔 침실 창문이 저절로 닫히기도 했다. 벽돌 한 조각이 저녁식사 테이블에 앉아 있던 포이스터 목사의 접시 옆에 떨어졌으며, 마리안은 화장실을 나서다가 또 다른 벽돌 조각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사용하지 않는 빈 방의 마룻바닥에서는 불에 타고 있는 물체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 유령의 출몰은 주택 철거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레그슨은 목사관 부지에 캠핑하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으며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1947년 6월 27일, BBC는 볼리에 나타나는 유령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프로듀서인 피터 이튼과 앨런 버지스가 녹음한, 목사관 지하 저장고에서 나는 두드림 소리 등이 소개되었다. 많은 사람이 유령이 교회로 이동했다고 믿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는 톡톡 두드리는 소리, 움직이는 물체들, 교회 안에 아무도 없을 때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 등의 현상이 있었다. 그리고 차를 타고 목사관을 지나다가 수녀를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1965년, 캐넌 레슬리 페널도 목격자 중 한 명이었으며, 수녀의 등장은 종종 운전하는 차의 기계적 고장과 동반해 일어났다.
미국인들은 왜 고스트헌터에 빠져들었을까?
미국인들이 유령 탐지 기술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기이한 현상이 일종의 열풍처럼 번진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열풍이란 다름 아닌 EVP, 전자 음성 현상이다. 1971년, 한 권의 스웨덴 책이 번역되었는데, 내용인즉슨 어딘가에 테이프녹음기를 혼자 돌아가게 놔둔 후 녹음된 것을 재생시켜 자세히 들어보면, 죽은 자가 당신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 콘스탄틴 라우디베(1909~1974)는 웁살라의 임상심리학자였고, 프리드리히 위르겐존이라는 이름의 괴짜 아티스트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959년, 위르겐존은 우연히 새소리를 녹음하던 과정에서 유령들이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중에서 그의 아내, 어머니, 아버지가 직접 대화를 시도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라우디베는 위르겐존과 함께 작업하며 이러한 전언을 수만 개 모았는데, 작업은 종종 통제되고 전류가 차단된 환경에서 진행되었으며 녹음된 말들은 대개 한 단어나 짧은 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우디베의 녹음은 2011년 5월 테이트 영국 갤러리에서 열린 수전 힐러의 전시회에서 다시금 대중에게 공개된 바 있다.
1982년, 미국 음성전기현상협회를 설립한 세라 이스텝은 이 기이한 현상을 체험하기 위해 자신이 ‘초능력 슈퍼스타’가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즉, 과학자들뿐 아니라 영매들조차 입지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민주화였다. 토머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모두 죽음 이후 영혼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태로 이동하며, 초전기적 힘의 형태를 띨 수 있다고 믿었다.
왜 영국에서 유령이 많이 목격될까?
영국에 유난히 유령이 많이 출몰하게 된 데에는 매우 독특한 배경이 있었다. 중세 시대, 유럽 전역에서는 죽은 자가 가끔 이승으로 돌아와 산 자를 따라다닌다는 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혼령의 출현이 연옥에 갇힌 영혼이 속죄하기 전까지 안식을 취하지 못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유령에 대한 고대의 신앙을 합리적으로 해석했다.(많은 부분은 이어받기도 했다.) 남아 있는 중세 시대 유령 이야기의 대부분은 성직자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이용했으며, 이 분야의 (M. R. 제임스를 포함한) 학자들에 의해 미라큘라miracula라는 장르로 알려졌다. 초기에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가경자可敬者 비드(?673~735)가 들려준, 죽은 수녀원장과 알고 지내던 토르드지타라고 불린 수녀 이야기가 있다. 죽은 수녀원장이 병약한 수녀에게 온갖 함정과 죄악으로 뒤덮여 있는 이 세속적 세상을 어떤 날에 떠나고 싶은지 물어보기 위해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그 밖의 유령으로는 멜로즈 수도원8의 유령 수사 보이질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순례지로 독일이 아닌 아일랜드를 택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지역적으로 사업을 선전하는 교회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었다.
종교개혁과 유령
종교와 유령의 관련을 한번 살펴보자. 유럽 종교개혁 이후 사람들이 유령을 계속 목격했을 때, 그들은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사람들이 마주치는 유령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대개 악마가 보낸 악령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마법의 쇠락Religion and The Decline of Magic』에서 키스 토머스는 레이디 팬쇼의 예를 인용했는데, 그녀는 1650년 11월 아일랜드에서 유령10을 목격했을 당시 유독 아일랜드에서 유령이 자주 목격되는 이유에 대해 남편과 밤을 지새우며 토론한 끝에 아일랜드인이 미신을 쉽게 믿는 경향이 있으며 악마의 공격을 막아낼 강한 신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유령을 믿는 것은 결국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했지만, 역시 전략적으로 정령과 유령에 대한 믿음을 옹호했던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인 감리교에 의해 더욱 대중적이 되었다. 감리교 창립자인 존 웨슬리는 엡워스의 생가에서 겪은 유령 현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 경험은 그가 창립한 종교에도 반영이 되었다. 감리교는 마법과 마술에 흥미를 갖는다는 점 때문에 영국 국교회로부터 정기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웨슬리는 죽은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846년, 감리교도들에게 타락하지 말 것을, 창립자의 믿음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소책자가 출간되었다. 흥미롭게도 웨슬리는 벽난로 옆에 앉은 신도 앞에 하얀 시트를 입고 나타난 유령으로 묘사되었는데, 거의 200년은 된 유령 묘사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