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피셜(superficial). 피상적인.
지금 한국 사회는 지독한 ‘피상성’ 때문에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사람들은 평균이란 틀에 갇혀 숨막혀한다.
외국에서는 흔히 한국을 ‘재미있는 지옥’에 비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쉼 없이 일하고, 그러고도 밤새 술을 마시는 나라는 지구상에 잘 없기 때문이다. 저자도 그 재미있는 지옥이란 것이 ‘다이내믹 코리아’의 역동성을 뜻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안쪽을 들여다보니 피상적인 인맥, 피상적인 제도, 피상적인 과시에 허덕이며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질주하는 이들이 많아 보였다.
왜 한국에는 원칙에 대한 존중 없이 얕은 편법이 난무하는가? 외부인에게는 한없이 차갑고, 끼리끼리의 결속력은 지나치게 끈끈한 슈퍼피셜한 슈퍼 네트워크 사회. 이런 슈퍼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안 되는 것도 없지만 되는 것도 없다”. 19대 대선 기간 대선후보 캠프에는 ‘두더지페서’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수많은 교수가 몰려들었다. 학자의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교수의 지위를 유지한 채 정치에 기웃거리는 폴리페서가 그토록 많은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외국에서는 이를 규제하기 위한 장치를 두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 교수들은 매년 봄이 되면 지난해 교수로 활동하면서 ‘책무의 상충(conflict of commitment)’과 ‘이해관계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에 해당하는 일이 있었는지 보고할 의무가 있다. 공정하게 룰을 지키며 본질과 원칙에 충실하자는 취지다.
원칙은 없는데 피상적인 규제는 지나치게 많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국책연구소가 발주한 용역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갖춰야 할 서류만도 열 가지가 넘을 만큼 많다. 계획서와 예산안, 참여자 이력서 정도만 제출하면 되는 외국과 딴판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필요한 규제는 요령과 편법, 예산 낭비와 효율성 저하를 가져오고, 형식에 치중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내용은 오히려 ‘슈퍼피셜’해진다.
대기업들은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음에도 불공정 합병 의혹, 탈세 의혹 등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다. 투명성이 결여된 치부(致富)의 결과다. 피상성은 개인의 삶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어려서는 좋은 대학에 가려고, 어른이 되어서는 슈퍼 네트워크에 편입되려고 끝없이 발버둥쳐야 하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를 불안으로 몰고 가며 매 순간을 절박하게 만든다. 어쩌면 한국은 공포와 불안을 에너지 삼아 굴러가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원칙에 목말라 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아 나라는 양극단으로 나뉘었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통합을 너무 쉽게 말한다. 대통령선거 때 가장 빈번하게 난무하는 슬로건 중 하나다. 하지만 통합을 말하려면 분열의 이유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다. 섣부른 통합을 주문할 게 아니라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각종 부패와 꼼수부터 뿌리뽑는 게 먼저 할 일 아닐까. (58쪽)
실패할 권리, 남과 다를 권리
실리콘밸리를 생동하게 만드는 정신
혁신은 기술이 아닌 문화에서 나온다. 어떤 것을 만들고 싶은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은지에 대한 상상이 존재한 후라야 비로소 기술로 그것을 실현한다. 그러니 사회 전반의 자유로운 분위기, 포용하는 문화가 없다면 한국 기업이 패스트 팔로어는 될 수 있어도 혁신을 주도하는 퍼스트 무버는 되기 어렵지 않을까. 실리콘밸리에서 찾은 청량제 같은 키워드들은 유의미한 영감을 준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 한국 기업들이 아직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소리를 듣는 이유는 한국 사람들이 똑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똑똑해서 두려움과 걱정이 과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패스트 팔로어 전략은 한계에 직면했다. 타인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전에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에 나서는 퍼스트 무버가 되어야 한다.
회복탄력성resilience: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한 경험이 성공의 필수 조건’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실패를 지극히 가치 있는 경험으로 여긴다. 트위터의 에번 윌리엄스는 2005년 설립한 오데오(odeo)라는 팟캐스팅 회사가 성공하지 못하자 마지막이라 여기고 떠난 2주간의 휴가에서 트위터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일화로 유명하다.
커미트먼트commitment: 커미트먼트는 ‘약속’ ‘헌신’ ‘전념’으로 번역되는데, 정말 본인이 하고 싶어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선발할 때 화려한 스펙을 가진 학생보다는 운동이든 음악이든 봉사활동이든 오랫동안 열정을 갖고 한 가지 일에 전념한 학생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준다. 이런 관점에서 인재를 키운다면 한국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을까.
다양성diversity: 다양성은 중요한 가치일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득이 된다. 미국의 많은 대학과 기업에서는 ‘다양성 책임자’를 두고 인종, 사회 계층, 성 정체성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 있는 조직에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나오는 유연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중에서도 저자가 특히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것을 포용할 줄 아는 유연성이다. 사회적 맥락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무조건 타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국이 그토록 외치는 ‘글로벌’ 시대에 다양성이란 화두는 피할 수 없는 주제다. 로마법만 강요하는 로마에는 이제 아무도 가지 않는 시대가 됐다. 한국 사회가 유연성을 획득하지 않는다면 해외 인재 유치는커녕 한국에 있던 인재마저 한국을 떠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생긴 대로’ 사는 것도 명백히 죄가 될 수 있다. 남과 다르게 생겼으면, 남과 다른 방식으로 살면, 특별히 피해를 주지 않아도 다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배척당할 수 있다. 모난 돌에 내려치는 정이 정당화되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외치는 사회는 얼마나 조용히 폭력적인가? (122쪽)
세계는 점차 다인종, 다문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도 말로는 다문화주의를 주창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화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결혼 이주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 이민 사회의 특성으로 볼 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주민들은 빠르게 한국 사회에 녹아들기를 요구받는다. 이들에게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한국어 수업, 김치 담그기 체험 등을 통해 결혼 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와 가정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주민들을 단순히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워서 한국인 남편, 시부모, 아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 기필코 ‘한국화’시켜야 할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은 한국 다문화주의의 미성숙함과 이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4쪽)
‘등 터지던 새우’에 작별을 고함
더이상 실패하면 안 되는 외교, 원칙은 분명하게 전략은 유연하게
한국이 중요한 외교안보 과제에 당면한 순간마다 저자는 한반도 정책에 관련된 세계의 석학, 실무진과 함께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했다. 스탠퍼드의 환경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페리 프로세스’로 유명한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 북핵 문제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지그프리트 헤커 박사, 주일대사와 브루킹스 연구소장을 지낸 베테랑 아시아 전문가인 마이클 아머코스트 전 대사 등이 지난 10여 년간 스탠퍼드 한국학 프로그램에서 함께 일해온 주요 멤버들이다.
한국 밖에서 이뤄지는 한국에 대한 온갖 담론이 오가는 현장의 중심에서 저자가 바라본 한국 외교의 접근 방식에는 안타까운 점이 많았다. 현재 한국 외교에 가장 절실한 것은 자신감과 주도성이다. 한국은 미들파워(middle power, 중추적 중견국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비유는 이제 한국 위상에 걸맞은 표현이 아니다. 전전긍긍하는 새우의 모습을 한 채 다른 나라 눈치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냉정한 국제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한국의 목소리를 내고 한국의 입장을 알려야 한다.
이처럼 한국의 역량과 역할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가 높지만, 자신감의 결여인지 겸손의 미덕인지 안타깝게도 한국의 외교는 여전히 뭔가 움츠린 모습이다. 북한 문제만 해도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미국과 중국이 해결해주길 바라는 모양새다. 남북 관계를 개선해 미국과 중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줄이고 우리의 전략적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 한국의 외교는 변해야 한다. 언제까지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까 전전긍긍하는 새우로 남을 수는 없다. (147쪽)
한편, 한국 외교안보 정책에는 상대를 제대로 알고 국제 여론이 어떤지 명확히 파악한 후에 가장 한국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마디로 ‘전략’이 중요하다. 외교안보 사안은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독도 문제, 사드에 대한 논란도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독도 문제는 아예 거론을 하지 않는 것이 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며, 사드 문제는 사드 자체의 위험성 문제도 있지만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성격이 짙음을 인식하고 그런 구도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자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독도 문제는 아예 거론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다.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가 자꾸 분쟁 지역 리스트에 오르면 사실 일본에 더 유리할 뿐이다. 영토 분쟁화를 꾀하는 일본의 전략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일본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도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과 러시아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독도와 쿠릴 열도는 영토 분쟁화하면서, 자신들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는 영토 분쟁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중적 전략을 펴고 있다. (215~216쪽)
사드와 관련된 논란은 시끄럽지만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사실 사드 자체는 그렇게 요란을 떨 만한 것이 아니다. (…)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에서 보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이렇다. 사드가 고고도에서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어 북한의 핵 공격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며, 동시에 사드 배치가 중국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미국도 중국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이 난리란 말인가?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은 미국과 중국 간의 샅바 싸움 성격이 짙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아시아 지역 곳곳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남중국해, 한반도가 그 주요 지역이다.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중국은 한국을 전통적인 한미 동맹, 더 나아가 한미일 공조 체제에서 좀 떼어놓고 싶은 반면, 미국은 그 영향력을 지속하고 싶어한다. 더구나 중국은 북한 체제의 붕괴나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중국이 북한을 놓지 못하는 것은 북한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미중 관계와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이 가진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장을 원하진 않지만 북한 체제의 붕괴는 더 좌시할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243쪽)
그리고 북한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에 ‘코리아 리스크’를 야기할 만큼 여전히 상존하는 위협이자 난제이며 그렇기에 결국은 한국이 북한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북한의 존재는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한국에 손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기에 결국 한국이 나서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아프고 따끔한 문장들이 간혹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저자의 쓴소리는 냉소와 회의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힘든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의 공간을 마련해보려는 의지의 소산이기에 슬그머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종종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현실을 이끄는 것은 상상력과 희망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낯선 땅에서 보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희망을 품는다는 건 언제나 쉽지만은 않았다. 희망을 간절히 바랄 때마다 내 안의 냉소와 회의주의가 고개를 쳐들던 순간이 가장 괴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헬조선은 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우리 함께 더 나은 한국을 만들어가보자”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는 그동안 미국 대학에서 재미 학자로, 한반도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고국에 대해 느꼈던 생각과 고민을 담았다. 비판을 위한 비판보다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나름의 고민을 거쳐 찾아낸 해법과 가능성을 담고자 했다. 절망하고 냉소를 보내기는 쉽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언제나 꿈을 꾸는 쪽에 서고 싶었다. 사람들은 종종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현실을 이끄는 것은 상상력과 희망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