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하는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1987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세상을 떠나자 한 신문에서는 “유르스나르가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고 부고를 띄웠다. 관용적인 표현이지만, ‘유랑하는 작가’ 유르스나르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을지도 모른다.
유르스나르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일반적인 학교 교육 대신 개인 교습을 받았고, 또래 친구들과 노는 대신 아버지와 함께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고전 문화를 익혔다. 동시대의 문학보다 과거의 문학을 더 사랑했으며, 현대가 아니라 머나먼 역사 속 시대를 동경했다. 전통적인 방식을 부정하는 ‘새로운 실험 소설’이 문단을 휩쓸던 시기에 유르스나르는 오히려 당시 문단의 경향과 배치되는 역사소설로 전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그는 미국 국적을 얻어 미국에 머무르면서도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여성이면서도 주로 남자가 주인공인 글을 썼으며, 남성 동성애자를 다룬 이야기도 여럿 있다. 살면서 사랑했던 두 남자는 모두 동성애자였고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반려자는 미국인 여성 그레이스 프릭이었다. 태어난 곳, 자리잡은 나라, 갖고 태어난 육체, 살아가는 시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시대와 관념의 이방인으로 살았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그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 끝없이 떠돌던 작가였다.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난 듯한 철저한 역사 고증과 당대의 보편적 관념에 저항하는 등장인물, 의도적으로 대상을 지우고 행간에 의미를 담는 글쓰기 등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독특한 문학 세계는 20세기 프랑스 문단을 넘어 전 세계를 매료했다. 그는 1951년 페미나 바카레스코 상을 시작으로 페미나상, 모나코 피에르 왕자 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 대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프랑스 최고의 학술 단체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1635년 설립된 이래 340여년 간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 원칙이 깨진 것은 1980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회원이 되면서다. 치열한 논쟁 끝에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마침내 역사상 첫 여성 회원을 받아들였고, 유르스나르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장 도르메송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는 문학의 승리다. 유르스나르가 받은 영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영예이기도 하다.”
알렉시, 진정한 자신을 찾는 ‘목소리의 초상’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유르스나르가 본격적인 작가로서 처음 세상에 내놓은 소설로, 유르스나르 작품 세계의 시작이자 기반이 된 작품이다.
이 글은 알렉시가 아내 모니크를 떠나며 남긴 편지글 형식이다. 그는 편지 안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고백하면서, 거짓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좀더 온전한 성적 자유를 찾기 위해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알렉시는 몇 번이나 ‘포기했다’ ‘갈라섰다’ ‘타협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대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본능’ ‘기질’ ‘성향’ ‘과오’ 등으로 돌려 표현할 뿐이다. “미리 겁을 집어먹고 무서워했던 것”이라고 모호하게 지칭하기도 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고뇌와 망설임의 변주로 가득한 이 고백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알렉시의 목소리와 작가 유르스나르의 목소리를 겹쳐보게 된다. 시대적 관념의 이방인으로 살았던 유르스나르가 작가로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 인물이 오랜 고뇌 끝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떠나기를 선택한 알렉시라는 사실은, 그저 우연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르스나르는 「알렉시」의 머리말에서 앙드레 지드의 『코리동』을 언급한다. 두 인물이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코리동』은 여러 해에 걸쳐 익명으로 발표되었고, 지드는 십 년이 넘게 지난 1924년에야 발표했던 글을 모아 저자 이름과 함께 출간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금지의 낙인이 찍혀 있던” 주제가 이제 막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당시에, 이름도 없던 젊은 여성 작가가 출간한 「알렉시」가 얼마나 과감하고 대담한 시도였을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은총의 일격, 시점의 편차 뒤로 숨겨둔 의도와 진실
「은총의 일격」은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고립된 발트 해 지역의 오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소피와 콘라드 남매, 그들의 오랜 친구인 에릭 세 사람의 관계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에릭에게 마음을 바치려는 소피와 그런 소피를 받아들이지 않는 에릭,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콘라드의 관계는 얼핏 보면 평범한 삼각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일부러 삭제하고 배열을 바꾼 문장 뒤에는 보다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유르스나르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뒤로 두고 주변의 것을 기술하고 묘사해 대상을 드러나게 만드는 ‘음각적 글쓰기’ 기법을 활용한다. 먼저 주인공 에릭이 동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면서, 화자의 시점 뒤로 진실의 한 면을 감춘다. 또한 콘라드를 향한 감정을 숨겨두려는 에릭의 의도와 소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에릭의 오해를 이용해 다시 한번 시점의 편차를 만든다. 에릭의 시점에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콘라드와 소피의 진실은 왜곡되고 에릭의 본심은 감춰진다.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게 배열한 문장과 단어 사이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의도가 숨어 있고, 그래서 독자는 단어와 문장 자체보다도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더 많은 내용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유르스나르는 이 소설에서 역사소설 작가의 능력을 훌륭히 발휘했다. 전쟁 당시의 세부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군용 자료에서부터 잡지 구석에 실린 작은 기사까지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꼼꼼하게 조사했다. 철저한 고증 덕에 「은총의 일격」은 전쟁 소설로서 “스티븐 크레인의 『붉은 무공 훈장』이나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에 비할 만한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