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거슬러 떠오른 연
시어도어 드라이저 그리고 『시스터 캐리』
세계문학사에서 자연주의는 다윈주의의 생물학적·환경론적 결정론에 영향을 받아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전과 환경의 산물로 보며,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그린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생겨난 이 문학사조는 에밀 졸라의 작품에서 꽃을 피웠고, 미국으로 전해져 프랭크 노리스를 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중인 도시 환경 속 이민자와 빈곤층의 삶을 주목했는데, 이러한 특징은 드라이저 개인의 성장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1871년 인디애나 주 테러호트의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 탓에 여러 지역을 떠돌며 고단한 성장기를 보낸다. 가까스로 대학에 입학하지만 고독과 절망감에 중퇴하고 시카고의 작은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하며 빠르게 변모하는 미국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직접 보고 듣게 된다. 이 시절 접한 찰스 다윈, 허버트 스펜서의 이론과 발자크, 졸라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오늘날 미국 문학사를 수놓는 『시스터 캐리』를 집필하게 된다.
드라이저의 첫 작품인 『시스터 캐리』의 출간 과정에서 발생한 논란은 문학사에서 유명한 일화로 손꼽힌다. 친구 아서 헨리의 조언으로 장편소설을 쓰게 된 드라이저는 1900년 3월 말 집필을 마친다. 유수 출판사에 투고하나 거절당하고, 5월 초 자연주의 소설로 명망을 날리던 작가 프랭크 노리스가 근무하는 출판사 ‘더블데이 앤드 페이지’에 원고를 보낸다. 작품을 읽은 노리스는 사장이 부재한 때에 출간계약을 추진한다. 이후 원고를 접한 더블데이는 “부도덕하고 조잡하게 쓴 작품”이라 혹평하며 『시스터 캐리』 출간계약을 무효화하려 하나, 젊은 신인 드라이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결국 계약에 따라 출간된다. 초판으로 고작 1008부가 제작된다. 아무런 광고도 따르지 않았고 순 판매는 465부에 그친다. 129부가 서평을 위해 배포되었는데 그야말로 혹평과 비난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드라이저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자살까지 결심하게 되고 다음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지만, 작품의 운명은 ‘바람을 거슬러 떠오른 연’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이 지배하던 당대의 모진 비난을 넘어서 미국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잔인하고도 무자비하며 날카로운 사실성,
삶의 한 측면을 그대로 찢어낸 날것의 소설
『시스터 캐리』는 대도시로 상경한 시골 처녀인 캐리 미버가 배우로 성공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상과 그 속에서 들끓는 인간의 욕망을 묘파한 작품이다. 1889년 열여덟 살의 캐리는 변변찮은 무기도 없이 ‘도시를 굴복시켜 제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발밑에 공손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겠다는, 그런 모호하고 아득한 최고의 권력을 꿈꾸며’ 언니네 부부가 사는 시카고로 향한다. 시카고행 기차에서 맵시 좋은 새 정장을 입고 돈뭉치가 가득한 지갑을 손에 쥔 영업사원 찰스 드루에를 만나면서 캐리는 부와 성공을 향한 열망에 이끌린다.
시카고에 도착해 일자리를 찾아 산업지구를 헤매는 캐리의 행보를 따라, 드라이저는 당시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시카고의 면면과 대도시 최하계층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이민자와 여성의 삶을 보도하듯 그린다. 19세기 말 시카고는 미국 내 축산업의 중추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도시이자 ‘사회의 쓰레기들이 기어다니는 암흑가’가 번성한 어둠의 도시였고, 미국 최초의 백화점들이 문을 열 정도로 온갖 멋진 것들이 가득한 빛나는 도시였다. 캐리는 가까스로 얻은 주급 4달러 50센트짜리 일자리마저 잃고 다시 시골로 돌아가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우연히 드루에와 재회하고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이로써 안락한 생활을 얻지만, 캐리는 드루에를 통해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고급 술집의 지배인 허스트우드를 만나 보다 높은 부와 성공의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
허스트우드가 술기운에 돈을 훔치고 충동적인 계략으로 캐리를 데리고 도망쳐 뉴욕에 정착하게 되면서 캐리와 허스트우드의 삶은 점차로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드라이저는 인간이 저마다 놓인 환경과 유전적 요인 그리고 열망에 따라 삶의 궤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분석적으로 제시한다. 젊고 아름다운 캐리는 늘 보다 나은 것, 높은 것을 열망하며 부와 성공을 좇아 화려한 무대를 통해 도약하는 반면, 그러한 캐리의 가치에 매료된 허스트우드는 가정과 부,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을 시작으로 마흔이 넘어 겪게 된 시련에 굴복해버리고 그저 무기력하게 삶의 가파른 비탈길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캐리는 코러스 걸로 시작해 주급 12, 20, 35달러로 점차 오르다 주연배우로 150달러짜리 전속계약을 맺게 되지만, 캐리가 떠난 후 허스트우드는 홀로 하루 50센트짜리 방에서부터 35, 10센트, 이내 길거리를 전전하며 무료 급식소에서 얻어먹는 처지로 전락하는 과정이 차갑게 그려진다.
악이 아니라 더 나은 것에 대한 갈망이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경우가 더 많다. 악이 아니라 선이, 이성적인 사고에는 익숙지 않고 느낄 줄만 아는 정신을 유혹하는 일이 더 많은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 드루에와 동거하게 됐을 때 그녀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이제 난 최고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야.’ 허스트우드가 겉보기에 더 나은 길을 그녀 앞에 제시했을 때에도 그랬다. ‘이제 행복해.’ 하지만 세상은 그 어리석음에 같이 어울리려 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남겨두고 제 갈 길을 가버리는 법이라, 그녀는 이제 혼자였다.
캐리는 대도시로 들어올 때 ‘모호하고 아득한 최고의 권력’을 꿈꾸었다. 이제는 멋진 옷과 화려한 마차, 우아한 가구와 든든한 은행계좌, 무엇보다 그녀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굽실거리는 사람들 등 인생의 목표로 여겼던 것들의 일부를 얻었다. ‘캐리’라는 인간형의 다음에 대해 드라이저는 냉혹한 결론을 내린다. 소설의 마지막, 외로이 흔들의자에 앉아 몽상에 빠져든 캐리의 모습으로 말이다.
캐리는 슬픔에 젖어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 나은 것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손만 뻗으면 위안이 되는 것들은 주위에 있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갈망하기만 할 뿐이었다. (…) 아, 캐리, 캐리여! 아,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인간의 마음이여! 그것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움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마음은 그것을 알아보고 응답하며 뒤따른다. 발길은 지치고 희망은 헛되어 보일 때, 바로 그때 가슴이 아파오고 갈망이 솟아오른다. 그때에야 비로소 싫증을 내지도, 만족하지도 못함을 알리라.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서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관련 서평
드라이저는 우리 시대 작가들 중 최고다. _F. 스콧 피츠제럴드
『시스터 캐리』는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미국 작가가 쓴 최고의 데뷔작이다. 놀라운 작품이다. _E. L. 닥터로
드라이저의 소설은 삶의 한 측면을 그대로 찢어낸 것이기에 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_솔 벨로
미국 문학사에서 드라이저는 소심하고 점잖은 체하는 빅토리아 시대로부터 삶에 대한 열정과 정직함, 그리고 대범함으로 향하는 길을 낸 개척자였다. 그가 홀로, 인정은커녕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이 길을 개척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 중 누가 감옥에 갈 걱정 없이 삶과 아름다움, 공포를 표현할 수 있었을까. _싱클레어 루이스
미국 문학은 드라이저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다. 생물학이 다윈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처럼. _H. L. 멩켄(문학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