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마스터’,
로마사를 이 한 권으로 마스터한다!
현대 세계의 거울, 로마 제국!
그 시스템의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건국 이야기에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거쳐
오현제의 치세, 그리고 제국의 분열에 이르는 장대한 파노라마!
방대한 도로망과 물류 체계, 도시 네트워크의 정비 등에 주목
고고학적 근거 위에서 사회경제까지 구조적으로 파악한 통사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국가로 평가받는 고대 로마 제국은 어떻게 탄생하고 멸망했는가? 그토록 광대한 영역을 지배할 수 있게 한 시스템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책은 트로이 전쟁에서 비롯되는 건국 신화, 용장 한니발과의 전쟁,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하,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수립, 오현제 시대를 거쳐 제국의 동서 분열에 이르기까지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역할, 사회경제적 구조 등에 주목하면서 로마 제국의 전체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제국을 실질적으로 창건한 아우구스투스는 마침내 정규군을 절반으로 줄였는데, 이로써 도로, 상하수도, 공공 건축 등 사회 기반시설 정비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번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지중해 세계를 단일국가로 통합하고 그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 데 있었다. 고도로 발달한 사람, 물자, 정보의 네트워크와 실효성 있는 속주 지배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마 제국은 결국 네트워크 시스템이 지나치게 발달한 탓에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기본 시각이다.
해상과 내륙 수로를 통한 물류 시스템
해상 및 내륙 수로를 최대한 활용한 로마의 물류 시스템은 식량이나 건축자재 등의 물자만이 아니라 각 지역의 주민들을 원거리까지 이동시킴으로써 정보나 문화의 교류에도 크게 공헌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근 3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요소가 작용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로마의 패권이 확립되기 전에는 잉여농산물을 둘러싼 전쟁이 자주 일어났고, 또 기상 여건에 따라서는 기근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카이사르에게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영역국가를 수립하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있었다. 이러한 구상을 제국의 통치체제로서 실현한 인물이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는 방대한 양의 식량을 과부족 없이 제국 각지에 분배하는 수단으로서 물류 시스템을 확립했다. 당시 로마의 주요 간선도로는 총연장 약 8만 킬로미터로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량 등의 대량 운송에는 적절하지 않아 바다나 하천을 통한 수로 운송에 의존했다. 육로 운송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해상 운송을 1로 잡을 경우, 내륙 수로 운송은 그 4.9배, 육로 운송은 그 28배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지은이는 추산한다.
수도 로마의 식량 사정
인구 100만 명의 수도 로마가 속주에 의존한 밀의 양은 매년 42만 톤이 넘었다고 한다. 그중 4개월분, 약 14만 톤은 이집트에, 나머지는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던 북아프리카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찍이 수도 로마의 중요한 식량원이었던 시칠리아는 1세기 전반에 그 역할이 끝났다. 밀 42만 톤을 운송하는 수단은 선박이었다. 만약 육로로 운송했다면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오는 밀은 비용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식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지중해가 호수처럼 평온한 시기에 적재량이 100톤에서 300톤에 이르는 선박 1,400척이 수도 로마의 가장 큰 외항인 나폴리 만의 푸테올리(현재의 포추올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소형 선박에 옮겨 실은 밀이 오스티아로 운반되고, 거기에서 다시 테베레 강을 거슬러올라가 로마에 도착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기반
제정이 정착된 것으로 여겨지던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전권을 원로원에 반환하려 했지만 오히려 원로원의 결정에 의해 집정관직 유지는 물론이고 속주 총독으로서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등의 속주들에 대한 명령권까지 새로 획득했다. 남은 속주는 공화정의 제도에 따라 원로원이 뽑는 속주 총독에게 각각 속주 명령권이 주어졌다. 제국 전체의 속주가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로 구분된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 이탈리아와 이집트였다. 이탈리아는 집정관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지이고,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 개인이 소유한 특별한 땅으로서 황제의 재산에 속했다. 황제와 원로원이 이렇게 속주 통치를 분담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원로원과 동등한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의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상 로마 전군의 최고 지휘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고, 결국 그는 ‘존엄한 자’를 의미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는다. 권위를 의미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를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빛과 울림을 갖는 존칭이다.
수도 로마에서 벌인 대규모 건설 사업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 곳곳에 많은 건물을 세웠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면서 정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사업은 또 카이사르와는 선을 긋고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자, 권력의 승계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정치적 목적을 가진 건설 사업 외에도 여러 신전, 극장, 원형경기장, 공중목욕탕을 건립하고 곡물 창고나 시장의 건설, 상하수도 정비 등으로 사회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등, 아우구스투스는 그야말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었다.
지방도시의 대대적인 건설
아우구스투스가 속주 정비 과정에서 많은 도시를 건설한 것은 우선 제대병들의 처우를 위해서였고, 또하나는 속주를 로마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악티움 해전 당시 로마의 정규 군단은 60개나 되었는데, 1개 군단에 6천 명의 장병이 있었으므로 모두 36만 명이나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병력을 28개 군단, 약 15만 명으로 감축했다. 내란을 종결한 만큼 변경지대 같은 군사 분쟁 위험이 있는 곳에 효율적으로 배치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역에서 벗어난 병사나 제대한 병사가 줄잡아 20만 명이 넘어, 그들을 그대로 두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그에 따라 악티움 해전의 군영지에 니코폴리스(‘승리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거나 히스파니아 오지에 에메리타 아우구스타(현재의 메리다)를 건설하는 등 120여 개의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빵과 서커스’의 상징이었던 콜로세움의 건설
약 4만 5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서기 80년에 완공되었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검투사 경기와 대경마장에서 벌어진 전차 경주를 합치면 경기가 열리는 날이 연간 80일이나 되었고, 2세기 후반에는 135일로 늘어났다. 이런 행사는 황제가 거의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황제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오락을 로마인들은 ‘키르쿠스’라 했는데, ‘빵과 서커스’ 가운데 ‘서커스’를 가리킨다. 당시 수도 로마에서는 20만 명 이상의 성인 남자가 밀을 무료로 배급 받고 있었다. 성인 남자 한 사람에 아내와 자식이 한 사람씩 있다고 한다면 약 60만 명분의 밀을 배급해야 했는데, 그 부담 역시 황제가 졌다. 이같은 식량 무료 배급을 일반적으로 ‘빵’이라 하고, 황제가 시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전체를 ‘빵과 서커스’라고 했다.
책 속으로
그 장소는 암늑대가 형제를 거두었던 행운의 테베레 강 기슭, 일곱 개의 언덕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레무스는 일곱 개의 언덕 중 강변에 가깝고 게다가 방어하기에도 적합한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도시에 두 명의 지배자가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레무스를 죽인 로물루스가 왕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로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24∼25쪽)
정치적 평등을 쟁취하고자 하는 평민의 실력 행사 앞에서 귀족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450년경, 그리스의 법을 참고해서 편찬한 법이 열두 장의 청동판에 새겨져 시민 생활의 중심인 포룸 로마눔 광장에서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이 ‘12표법’으로 불리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입니다. (47쪽)
로마의 동맹시였던 많은 지방 도시는 서로 뭉쳐 시민권 확대를 위한 전쟁(동맹시 전쟁, 기원전 91~88)을 시작했습니다. (…) 이 전쟁은 로마가 일방적으로 양보하면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동등한 시민권을 가진 국민을 대거 거느린 영역국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또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로마의 민회가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로마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84쪽)
기원전 12년, 아우구스투스는 전임 대신관이 사망함에 따라 대신관에 취임하여 공적인 종교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신관의 수장으로서 로마 종교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8월을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8월을 뜻하는 영단어 ‘어거스트(August)’의 어원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2년, 원로원과 기사계급과 로마 국민이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친 최후의 존칭이 ‘국부(pater patriae)’였습니다. (103∼104쪽)
42만 톤이라는 대량의 밀을 운반하는 수단은 선박이었습니다. 물론 철도나 트럭이 없었던 고대에 대량의 물자 운반은 바닷길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바다를 통해 운반하는 비용을 육로로 운반하는 것과 비교하면 약 30분의 1밖에 안 든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만약 육로로 운반했다면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오는 밀은 서민의 식탁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만 봐도 로마 제국이 얼마나 지중해라는 평온한 바다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51쪽)
사태가 심각함을 알게 된 네로는 그리스에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6만의 병사를 팔레스티나에 투입합니다. 유능한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는 순식간에 유대 민족을 제압하고 최후의 목표인 예루살렘 공격에 돌입합니다. 이때 네로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방 속주에서는 군단이 각각 황제를 천거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기 위해 수도로 향했습니다. (177쪽)
약 4만 5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에서의 검투사 경기와 대경마장에서의 전차 경주를 합하면 경기가 열리는 날은 연간 80일이나 되었고, 2세기 후반에는 135일로 늘어났습니다. (…) 이런 종류의 오락을 로마인은 ‘키르쿠스’라 했습니다. 이는 로마가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대의 생활을 나타내는 ‘빵과 서커스’ 가운데 ‘서커스’를 말합니다. 그러면 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80∼182쪽)
게다가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려면 병사의 수와 군사비를 늘려야 합니다.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군사비를 같은 재정 규모 안에서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증세를 했지만 거기에도 한도가 있기 때문에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준다고 하는, 국가의 근간을 바꿀 만한 정책을 실시해서라도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려는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