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무심히 걸으며 난 많은 자유를 얻었다!”
― 자유로운 영혼 손현주의, 파리에서 보낸 아름다운 한철
“나는 아침의 파리도 사랑하고, 저녁의 파리도 사랑하고, 봄의 파리도 사랑하고, 여름의 파리도 사랑하고, 가을의 파리도 사랑하고, 겨울의 파리도 사랑한다.”
왕년 프랑스 최고의 국민 가수이자 배우인 이브 몽탕은 파리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세계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파리만큼 ‘사랑’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곳도 드물지 싶다. 비록 너무나 흔해서 심히 식상하기까지 한 단어이지만, 그럼에도 역시 파리는 영원히 사랑일 것이다.
이 책은 전직 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음식과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손현주가 지난 2년간 이 도시를 드나들며 그 사랑을 기록한 “파리 오마주”이자 “파리 감성 상자”다. 파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와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15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흙먼지 폴폴 이는 포도원 고랑을 돌아다녔고, 그 주인들과 잔을 기울였으며, 주머니 여유만큼 와인 가게를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파리라는 공간은 조금씩 그녀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순히 파리의 미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산실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요리사를 어떻게 길러 내는지를 비롯하여, 그곳의 주방 풍경, 요리사의 치열한 하루하루와 애환 등을 ‘빈’(본명 최수빈)이라는 한 젊은 여성 요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현장감 있게 들려준다. 사실 파리의 맛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책은 이미 차고도 넘칠 만큼 나와 있다. 이 책이 그런 유의 것과 다른 점이라면 바로 이런 대목일 것이다. 그 밖에도 벼룩시장, 헌책방, 레즈비언 전문 서점, 빈티지 구두 가게, 퐁피두광장, 마레 지구, 할머니들의 남다른 패션, 센강 주변의 풍경 등 느릿한 산보객으로서 해찰하며 담은 파리의 구석구석도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그 풍경에는 파리만의 자유와 해방과 낭만이 넘실거린다. 그래서인지 저자도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무심히 걸으면서 난 많은 자유를 얻었다. 〔중략〕 누구도 의식하지 말자. 파리에서 나는 혼자이며,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여름에 겨울 코트를 입고 다닌들, 다 벗고 다닌들 그들은 무관심하다. 그러니 파리에서는 자유로워지자, 걷고 즐기면 그만이다.”(239쪽)
그렇다고 파리에 대한 예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맛과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현재 파리는 자신만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 같다고 말한다.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답게 음식에서도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처럼 변하여 ‘이것이 파리의 음식이다’라고 할 만한 게 없어 보인다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미슐랭 가이드 스타 레스토랑들의 허와 실도 짚었다. 또한 거리에서는 늘 조심해야 해야 할 만큼 현재 파리는 많이 위험하다고도 전한다. 어린 집시들에게 순식간에 털리는 경우도 흔하고, 대놓고 신체를 위협당하며 갈취당하는 일도 다반사라고 한다. 그뿐인가. 파리의 거리 여기저기서 들끓는 냄새는 또 어떠한가. 그런 것이 싫어 한동안 이 도시를 멀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파리가 가진 어떤 상징성 혹은 아우라 때문인지 한 계절만 지나면 가슴속에 들어와 있었다고 하니, 오명과 고귀함이 공존하는 이 도시는 그곳을 걸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자신만의 체취가 느껴지는 글맛과 함께 이 책에서는 사진을 보는 맛도 각별하다. 저자의 해찰에는 카메라도 늘 함께했다. 사실 그녀는 이미 개인전까지 연 바 있는 프로 사진가다. 온 국민이 사진가라는 시대라고 할 만큼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사진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감각적으로 잘 담아 낸 사진들을 모두 보고 나면 파리에 무척 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세부 소개
파리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크게 세 부분으로 변주되어 있다. 1부에는 저자 본연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미식 산책이 담겨 있다. 바게트에서부터, 도시 외곽으로 있는 작지만 저렴하면서도 알찬 식당들이며, 미슐랭 가이드 스타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직접 맛을 보고 쓰고 싶은 곳만 썼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맛에 대한 이런저런 주관적 비평보다는 분위기와 배경을 그리는 데 초점을 두었다. 저자의 미식 산책 한가운데는 와인이 놓여 있다.
“생각해보면 프랑스 음식이 콩콩거리며 조심스럽게 가슴속에 들어온 것은 순전히 와인 때문이지 싶다. 프랑스에서는 음식이 있는 자리라면 자연스럽게 와인 잔이 놓이며, 서로 잔을 부딪치며 웃는다.”(19쪽)
프랑스인들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이 땅과 우주의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는 깊은 영감의 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린아이 눈동자처럼 초롱하거나 석양처럼 그윽한 와인이 있는데 맛있는 음식이 따라오지 않을 리 없다. 저자는 특히 토속 요리와 그 지역에서 나는 와인의 조합에 대해 공들여 말한다. 가령 중세 시대의 요새인 랑그도크 지역의 카르카손을 찾았을 때다. 전쟁과 죽음을 상징하는 영화 세트장처럼 낯설고 기묘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두려움을 잊게 해준 것은 걸쭉한 스튜인 ‘카술레’였다고 한다. 그것은 본래 먼 옛날부터 내려오던 농부들의 음식이라 한다. “큰 도기 그릇에 콩과 돼지고기, 소시지를 넣고 고기즙과 마늘, 양파, 고깃가루, 향신료로 맛을 내 종일 뭉근하게 끓인다. 농부들은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 전날 먹다 남은 식재료를 모두 솥에 넣고 페치카 위에 걸어두었을 것이다. 고단한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 솥에 들어 있던 것은 끓고 졸아서 먹기 좋은 국물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농부들의 기도 같은 음식인 카술레. 거기에 막잔에 따라 마시던 토착 품종의 와인은 얼마나 맛있고 달았겠는가.”(24∼25쪽)
음식을 단순히 혀끝의 감각적 쾌락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문화와 생활과 역사와 어우러진 인문적 덩어리로 읽으려는 저자의 시각이 미덥게 다가온다. 그런 모습은 파리가 미식의 도시가 된 배경에 프랑스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여실히 느껴진다.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하다못해 바게트의 규격과 맛까지도 하나로 규정하게 했을 정도라고 하니, 실로 혁명을 빼놓고 현재의 프랑스 음식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렇듯 음식을 음식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1부는 한 편의 ‘음식 인문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편 1부에서는 프랑스에서 10년 이상 산 번역 전문가 박은진과 와인 전문가 김성중이 소개하는 단골집도 놓칠 수 없다.
2부는 빈이라는 한 젊은 여성 요리사의 분투기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스무 살 소녀가 요리사가 되기 위해 제 홀로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생텍쥐베리공항에 내리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좌충우돌을 겪는다. 처음에는 리옹에 있는 폴보퀴즈 입학을 노렸으나 2년 반 뒤 파리로 이동하여 르코르동블뢰에 들어가 본격적인 요리 수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겪은 실수담이며, 복장 터지는 인간관계며,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이며, 살기 위해 처리해야 하는 여러 서류 업무와 관련된 일화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2부에서는 특히 저자의 전직 기자 출신다운 면모가 돋보인다. 바로 르코르동블뢰에서는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는지를 밀착 취재한 대목으로, 프랑스에서는 요리사를 어떻게 길러내는지 그 한 단면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해준다.
3부는 ‘한 낭만 산보자의 파리 소묘’라 말할 수 있겠다. 저자는 오래전 외젠 앗제가 새벽에 사진을 찍던 오래된 골목을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고흐의 슬픈 생애를 떠올리며 그가 잠들어 있는 마을을 찾기도 하고, 막 오픈한 갤러리에 들어가 모르는 작가와 짧으면서 상투적인 인사를 건네고는 그림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숙소의 창문가에 앉아 오랫동안 거리를 응시하기도 하고, 오래된 벼룩시장을 둘러보며 파리의 과거를 엿보기도 하며, 날마다 퐁피두광장에 나가 누워서 하늘을 보거나 사람들을 구경하고, 고서점에 들러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낯선 인연을 기다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파리는 그녀에게 들어와 사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