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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연필시문학상, 제15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시인
박혜선의 네 번째 동시집 출간
가족의 일상, 도시의 서정이 깃든 동시집
1992년 새벗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후, 제2회 푸른문학상, 제1회 연필시문학상, 제15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박혜선 시인의 새 동시집 『백수 삼촌을 부탁해요』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4년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줄곧 동시를 놓지 않았던 시인이 『개구리 동네 게시판』(2001, 아동문예사),『텔레비전은 무죄』(2004, 푸른책들),『위풍당당 박한별』(2010, 푸른책들) 이후 네 번째로 펴내는 동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책에서 오늘날 아이들이 발 디딘 도시의 삶을 두루 살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 무수한 익명의 타자들, 소외된 존재들에 귀를 기울이고, ‘나’와 이웃의 관계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며 적확한 언어와 기발하고 재미있는 형식의 시로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려 선보이고 있다.
박혜선의 동시들은 가족의 일상, 도시 삶의 일상을 주목한다. 색다르고 예외적인 상황을 찾기보다 흔히 경험할 수 있고 주위에서 종종 관찰되는 일들을 택해 이를 꼼꼼하게, 적확한 언어로 그려 냈다. 대상과의 거리 감각과 긴장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평범한 일상 이야기임에도 재미있게 다가오고 생각할 여운을 준다. 4·4조 가사(歌辭) 형식, 국어사전의 말풀이 형식, 방송 뉴스 형식 등을 활용해 형태상의 변화와 함께 내용의 다양화를 보여 준 것도 흥미롭다. _김이구(아동문학평론가)
유쾌하지만 가벼이 웃어넘길 수 없는
사회의 다양한 단면이 응축된 동시들
시인은 2006년 『동화읽는가족』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을 작정입니다. 아직 서툰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가 진실로 통한다면 시 쓰는 보람도 크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년 뒤 출간된 『백수 삼촌을 부탁해요』에는 시인이 그간 관심을 기울여 온 우리 사회의 모습들이 응축되어 있다. 아이다운 어법과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들을 그렸지만, 그 안에는 어른이 들어도 심상찮게 느껴질 만한 의미들이 숨어 있다.
구들장 귀신이 붙었다고 잔소리하면서도
밤마다 기도하는 할머니
“저놈 아가 내 자식이라가 아이라
심성이 곱고 법 없이도 살 놈입니더
어디든 가기만 하믄
해 안 끼치고 단디 할 낍니더
그라니까네 잘 좀 봐주이소.”
저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삼촌이 아직 구들장 지고 있는 거 보면
하나님이 할머니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거다.
_「백수 삼촌을 위한 기도」 전문
삼촌이 취직을 못 하는 건 할머니의 사투리 기도를 하느님이 못 알아듣기 때문이라는 「백수 삼촌을 위한 기도」, 아침에 이불 개라는 말을 직사각형, 정사각형, 마름모 등 갖가지 도형을 동원해 하고 있는 「공부도 가지가지」, “저를 믿어 주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외치는 정치인들의 공언을 여름날 매미 소리에 비유하는 「맴맴맴」 등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쉽게 웃어넘길 수 없는 시들이다. 곰곰이 시를 곱씹어 보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교육현실, 선거철마다 들려오는 정치인의 헛된 공언 등의 씁쓸한 단면들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의 간절한 목소리를 담은 「내 신발에게」, 낡고 고장 난 사물들이 모인 창고 방 냄새에 할머니를 떠올리는 「늙은 방」, 도시의 소음 속에서 가냘프게 울고 있는 귀뚜라미를 그린 「지하철역에서 귀뚜리 소리를 듣다」 등은 도시인의 삶에서 쉽게 외면당해 온 존재들을 기리고 기억하며 타인의 존재가 우리와 결코 동떨어질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지금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
내 이야기처럼 내 마음을 알아주는 동시들
시인의 시 속에서는 도시 아이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도시에 사는 시인이 길을 건너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안녕, 어디 가니?” 말을 붙이며 나눈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받아 적은, 그들의 구체적 경험과 삶이 깃든 시들이기 때문이다. 밤늦도록 학원에서 공부하느라 얼굴 볼 새 없는 형을 그리워하는 아이(「자전거」), 백 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는데 “너 말고 누가 또 백 점 맞았어?” 하는 엄마의 물음에 풀죽은 아이(「반전」), 끝없이 아파트 상가를 보며 수학 시간에 배운 ‘패턴’을 떠올리는 아이(「패턴」) 등 이 동시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내 이야기’처럼 친숙하게 다가온다.
시인은 지금의 아이들 삶에 밀착한 풍경을 그려 도시 아이들이 처한 현재를 짚는다. “택배 아저씨라고 해도 절대 문 열어 주지 마.”라는 불안과 불신이 만연한 사회(「아저씨」), 층간 소음으로 이웃의 존재를 인식하는 소통 부족의 사회(「이웃들」) 등이 그것이다. 시인은 친구, 가족, 이웃 들 대신 휴대전화, 내비게이션, 현관 번호 키, 엘리베이터 속 목소리와 더 자주 관계 맺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 자리한 내밀한 고민과 열망을 대신 이야기해 준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물웅덩이를 만든 빗물처럼 친구들과 한데 어울려 여기저기 자유롭게 쏘다니고 싶고(「빗방울」), “문이 열렸습니다.” 하고 말하는 현관 번호 키 대신 반갑게 자신을 맞아 줄 가족을 기다린다고(「고백」) 말이다. 웃음에 이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를 읽으며 아이들은 시원한 해방감과 뜨끈한 위로를 맛보게 될 것이다.
도시의 일상에 서정적 온기를 더하는 화가 이고은의 그림
『백수 삼촌을 부탁해요』의 그림은 세련된 화풍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화가 이고은이 맡았다. 회색조인 화면 곳곳에 따스한 노란색, 주황색을 배치한 그의 그림은 시 속 도시 정경에 조명을 켜듯 서정적 온기를 더한다. 사물 하나하나에 담은 세심한 감정들,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그림의 유머가 시의 목소리에 힘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