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함기석의 새 동시집
일상 속에 숨겨진 미지의 세계를 건드리다
살구나무 밑에/ 꿀벌이 죽어 있다// 오이가 넝쿨 팔을 뻗어/ 꿀벌을 만져 본다/ 음, 대체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했을까?// 오이는 벽을 타고 담 위로 올라가/ 더듬더듬 범인의 발자국을 찾는다// 지붕으로 휙,/ 도둑고양이가 지나간다/ 음, 아무래도 저놈이 수상해// 머리 위로 씽/ 박새가 날아간다/ 음, 음, 저놈도 수상해// 온종일 이쪽저쪽/ 방망이를 들고 기웃거리는/ 오이는 가제트 형사 (「오이는 가제트 형사」 전문)
시인 함기석의 새 동시집 『아무래도 수상해』가 출간됐다.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해 시인의 길로 들어선 함기석은 현재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펴내며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박인환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수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한 이력을 살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동시집 『숫자 벌레』를 내놓은 바 있다. 전작이 ‘수학’이라는 주제를 놓고 쓴 기획 작품이라면, 4년의 시간을 통과해온 이번 동시집은 아동문학의 토대가 되는 동시문단에 내딛은 본격적인 걸음이며, 시인이 그간 쌓아온 이력에 아이들을 향한 애정을 녹여낸 결실이다. 시인이 아이들과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에 다가가기 위해 어떠한 언어적 고민을 하는지 망라하여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귀한 장인 셈이다. 일상의 존재를 미지의 것으로 여기고 새로운 어법으로 끈질기게 좇아 비로소 세상의 정체에 가닿는 함기석 시인. 『아무래도 수상해』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뒤집는 놀이 정신을 토대로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시인의 개성과 상상력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온종일 이쪽저쪽” “기웃거리는” 그가 꺼내든 수상한 동시 48편을 만나보자. 온 우주가 보다 새롭고 낯설게 감각될 것이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천진한 눈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뒤집는 놀이의 정신
나는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려 합니다. 그럼 파도는 흰말을 타고 달리는 수천의 병사들로 보이고, 수련은 세상의 비밀을 엿듣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연못의 귀로 보입니다. 벌레들이 층층이 모여 사는 작은 나무는 커다란 임대 아파트로 보이고, 이가 몇 개 안 남은 할머니 입은 집이 몇 채 안 남은 철거 중인 마을로 보입니다. (‘책머리에’ 중에서)
함기석 시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존재나 풍경을 의심하고 질문한다. 그는 담을 넘는 덩굴부터 고꾸라진 개미와 마당의 물웅덩이까지, 사람들이 익숙해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무얼 보는 걸까?/ 무슨 생각 할까?”(「물웅덩이」) 바라보고 생각한다.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유성호가 짚었듯 “사물을 다르게 보는 천진한 눈”을 지닌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의 관심사에 마음을 온통 뺏기는 아이처럼 세상 만물을 끈질기게 탐구한다.
개미가 죽은 벌레를 입에 물고 가다가/ 고꾸라졌다/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게 된 개미/ 순간// 번쩍/ 지구가 들리고/ 하늘과 땅이 홀라당 뒤바뀐다// 구름은 개미 가랑이 밑에서 웃고/ 나무랑 집들은 하늘에 거꾸로 붙어 떠들고/ 사람들이 거꾸로 걸어 다닌다// 새들은 양팔 벌리고/ 하늘에 등을 대고 누워서 눈썰매 타듯/ 신나게 미끄러진다 (「빡빡머리 개미」 전문)
함기석 시인은 그동안 도서관, 복지관, 아동 센터 등에서 아이들과 함께 동시 쓰기를 해 왔다. “동시 놀이를 할 때 아이들과 나는 이 세상 무엇이든 되어 본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동시집에는 놀이를 즐기듯 세상에 접근하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노력을 해온 결과물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몸의 모양과 태도를 바꾸어가며 그가 만든 시편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도 않고 새삼스레 의구심을 품지도 않는 일상의 풍경과 언어가 새로워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단 하나다. 그것은 눈에 맺힌 풍경을 새롭게 감각하고 상상력을 작동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시인의 무궁한 탐구심과 집념이다.
현실과 환상의 뒤섞임
아이들의 내면과 세계를 파고드는 동화적 상상력
책 속에/ 열 마리 새가 자고 있다// 내가 꽁지를 톡톡 건드리자/ 깜짝 놀란 새들이/ 푸드덕 난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내 방 창문을 나가 숲으로 날아간다// 새들이 떠나자 숫자들이 꿈틀거린다 거미처럼/ 책에서 기어나온다/ 내 손을 타고 얼굴로 올라와/ 스멀스멀 기어 다니다// 방바닥으로 내려가/ 내 과자를 먹는다/ 내 가방도 먹고 필통도 먹고//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엄마 아빠가 잠든 안방으로 간다 (「수학 그림책」 전문)
함기석의 동시는 세계와 언어의 질서를 전복하는 독특한 시선과 상상력을 토대로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다. 모래를 가지고 노는 아이가 같은 재료를 가지고 매번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듯이, 일상의 풍경과 시인의 상상력이 서로 뒤섞이며 그의 동시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한밤중에 식구들이 잠들면/ 내 방 벽시계에서 열두 마리 박쥐가 나와/ 창밖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현관에선 구두들이 조잘조잘 떠들고/ 안방에선 옷들이 흔들흔들 춤추고/ 책들은 나비가 되어 거실을 둥둥 떠다닌다// 소파엔 풀이 돋고/ 내 휠체어는 말이 되어 뛰고/ 벽에선 칡넝쿨이 돋아나 줄기를 뻗고/ 우리 집은 날개 달린 배 인피니트호가 되어/ 머나먼 항해를 떠난다 (「꿈꾸는 집」부분)
『아무래도 수상해』에 깃든 환상성은 낯설고 이질적인 장면이지만 생생하고 실감난다. 시인이 아이들의 심리와 내면에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이 발견한 세상의 비밀스러운 움직임과 기미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아이들이 가진 꿈과 환상, 상처와 결핍을 건드린다. 시의 심상과 상상력을 연쇄적으로 밀고 나가는 동화적 상상력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아이들의 신비한 꿈과 환상, 아픈 기억과 상처를 어루만져 재밌는 말로 빚어내고 싶었다”는 시인의 바람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이들은 작지만 광대한 물방울 우주입니다.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꿈과 환상, 아픈 기억과 상처를 장미 꽃잎처럼 겹겹으로 쌓아 품고 있습니다. 그 눈빛과 상처, 꿈의 비밀들을 어루만져 재밌는 말로 빚어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시 슬픔을 잊고 깔깔댈 수 있도록 상상의 날개를 달아 주고 싶었습니다. (‘책머리에’ 중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와 그림
슬픔을 잊고 활주하는 그늘 속의 아이들
넌 왜 발이 없니?/ 내가 묻자, 눈사람은 발을 쑥 꺼낸다// 넌 왜 팔이 없니?/ 다시 묻자, 눈사람은 팔을 쑥 꺼내고는/ 내 귀에 속삭인다// 오십억 년 동안/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어/ 네가 처음이야, 이것 봐// 눈사람 손에/ 까만 풀씨 하나가 들려 있다/ 이게 뭐야?// 지구 최초의 씨앗이야/ 우리 저 황무지 벌판에 이 씨앗을 심을까?//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저녁/ 눈사람과 둘이서/ 어두운 벌판으로 달린다 (「눈사람의 비밀」 전문)
『아무래도 수상해』는 재미난 이야기를 품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 그림은 드러나지 않은 세상의 사정을 샅샅이 살핀 시인의 족적이며, 주어진 이름과 운명을 거부한 새로운 언어의 몸이다. 처음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이 이야기를 독자는 흥미롭게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토끼도둑이 함기석의 작품세계가 품은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시선과 상상력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그에 걸맞은 그림을 더해 힘을 실었다. 작고 여린 아이들의 목소리에 미주알고주알 맞장구쳐주는 두 사람의 합작. 이제 우리 아이들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동시의 세계로 활주할 차례다.
○ 추천사
함기석 아저씨의 동시집에는 사물을 다르게 보는 천진한 눈,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맛, 가장 긍정적이고 근원적이고 속 깊은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아저씨는 밀물과 썰물을 보고는 바닷속에 “길고 긴 시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도를 “비바람에 갈기를 휘날리며/ 수백 마리/ 수천 마리/ 흰말이” 달리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봄바람과 빗방울, 새들의 노래를 땅이 “새싹을 낳을 때” 아프지 말라고 서로 만지고 보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저씨만의 개성이자 상상력이 아닐까 합니다. _유성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