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에 카페 같은 도서관을,
동네 옥상에 국경 없는 놀이터를,
창살 달린 소년원에 식당극장을!
‘행복의 공간’을 디자인한 이 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상상력
젊은 예술가들, 문화 사각지대의 소외를 생각하다
일간지 문화 섹션에서, 건축 전문 월간지에서, 때로는 학회지에서, 현학적인 설명이 덧붙은 프로필과 함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던 대한민국의 스타 공간기획자와 문화기획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모두 모였다. 멋있어 보여도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 사각지대에 소외된 이웃의 삶에 공간과 예술로 참견하고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 프로젝트의 대상지가 된 공간은 소년원, 군대, 장애인 복지시설, 마을 공동체 등으로 하나같이 체계와 명령, 혹은 하루하루의 생활이 제1의 해결과제인 장소다. 그러나 새로운 공간과 문화가 유입되면서,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삶은 서서히 즐거운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난 지도 5주기, 하지만 이제 해병대 연평부대에 있는 연평도서관엔 정이삭 공간기획자가 지은 도서관이 있다. ‘육지’에서 가져온 재료로 도서관을 만들어 달라는 장병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이 도서관은 아늑한 카페를 연상케 한다. 한편, 서울 동작구 남성시장 좁은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동작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옥상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명한 주황색 선으로만 만든 놀이터인 ‘루프루프’가 만들어졌다. 이 놀이터는 국경 없는 놀이터다. 아직은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냉랭함, 또는 연민으로 덧칠된 사회에서 공간기획자와 기획자는 아이들이 먼저 서로 경계심 없이 어울려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여느 놀이터와 달리 평면의 공간에 올록볼록한 구릉을 만들어 뛰어다니고 올라가고 탐사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구세군군산목양원에는 ‘나 홀로 공간’이 생겼다. 24시간 내내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장애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혼자 조용히 있을 시간이다. 가끔 눈물이 날 때는 혼자서 울기도 하고 마음을 달랠 공간이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장애인도 공간을 욕망한다”는 단순한 진실을 바탕으로 만든 공간이 많지 않았다. 이 공간은 단체생활의 피로, 타인과 구별되는 장애인의 자아를 발견케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작지만 새로운 영감을 주는 시도다.
공간에 채울 문화를 함께 기획한 공간기획자와 문화기획자들의 즐거운 협업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가치는 별도의 문화기획자가 공간기획자와 기획 단계부터 협업하며 새로 만든 공간에 어떤 문화를 채워넣을지 함께 고민했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연평도서관은 공간 그 자체로도 전혀 군대에 있는 도서관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아늑한 공간이라는 점이 시각적으로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땡스북스 대표 이기섭을 만나 비로소 ‘책의 큐레이션’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이기섭은 마치 미술관의 기획전시처럼 매달 주제에 맞게 새로운 책을 선보이는 살아 있는 도서관을 기획해냈다. 젊고 궁금한 것 많은 장병을 위한 이 도서관의 키워드는 ‘호기심’이다.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청년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과 여가·취미·재미에 대한 호기심을 채울 수 있게 제목도 발랄한 책들을 배치했다. 예컨대 이런 제목의 책들이다. ‘남자의 기술’ ‘생존 지침서’ ‘나무의 온도’ ‘연필 깎기의 정석’ ‘반려식물’ ‘기타 멋지게 한 곡’ ‘젊은 오너셰프에게 묻다’ ‘천재 아라키의 진짜 사진론’ ‘자살보다 섹스’ ‘문신 유희’ 등등.
한편, 세 곳의 소년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에서 문화기획자들은 소년원이란 공간이 처벌과 교화, 혹은 교육 중 어느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하는 지점에서 많은 철학적 고민을 떠안았다. 이들은 소년들 사이에 녹아들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화 프로그램으로 이들의 마음을 여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울소년원 식당극장에서 소년들이 직접 올린 공연, 부산소년원 행복한 캐노피에 조각가와 아이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풍경 조각, 공놀이를 함께하지 않는 학생이더라도 관전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대전소년원 어울림 회랑이다. 문화기획자들은 소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감독 배윤호는 서울소년원에서의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과정에서 소년원이란 심리적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야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무런 이유 없이 묵묵히 수행하듯 소년원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소년원의 일상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서였다.
이 책은 월간 『공간SPACE』의 편집장인 박성진과 『공간SPACE』의 다른 기자들이 함께 썼다. 박성진은 머리말에서 “좀 과격하게 말한다면 문화란 배부른 사람의 것이다. (…) 꼭 돈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결핍된 이들의 몸과 마음엔 문화가 눈치껏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입을 뗐다. 그러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프로젝트 이후 만들어진 공간은 “그들의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짜리 삶을 되찾게 하는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었다고. 이 책은 화려하지 않은 우리 일상의 공간에 어떻게 문화를 짓고, 그 문화가 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작은 시도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문화로 행복한 공간 만들기’ 프로젝트는 올해에도 진행될 예정이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문화 소외 공간, 문화 사각지대 공간을 선정해 또다시 새로운 공간과 예술을 시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