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부키와 페소아의 마술 같은 인연이 빚어낸 삶과 문학의 궤적
오늘날 유럽문학사 풍경에서 페소아 옆에는 늘 타부키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한다. 타부키는 누구보다 페소아를 오랫동안 깊이 들여다본 작가이자, 이 낯선 작가를 기념비적인 문학사적 인물로 알리는 데 앞장선 작가다. 타부키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의 한 문학 강의에서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다 파리 어느 헌책방에서 발견한 아르망 기베르 번역의 프랑스어판 페소아 시집 『담배 가게』를 읽고 첫눈에 빠져들어, 그의 도시 리스본에 살다시피 하며 작품들을 섭렵해 유럽에 그를 번역, 소개하고 가장 명망 있는 페소아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함께 페소아 작품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고 전기도 쓴 문학가이자 이탈리아 피사 대학의 포르투갈어문학과 교수인 그의 아내 마리조세 드 란카스트르 역시 포르투갈 사람이었고, 타부키가 마지막 눈을 감은 곳도 이탈리아가 아니라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다.
페소아에 대한 연구자이자 열렬한 애독자로서의 이 면모는 타부키 작품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죽은 시인을 만나기 위해 리스본을 떠도는 이야기인 『레퀴엠』(1992년 이탈리아 PEN 문학상 수상, 1998년 알랭 타네가 영화화)은 모국어인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포르투갈어로 써서 자신을 문학세계로 이끈 페소아와 그의 도시 리스본에 대한 애정을 표해 화제를 모았고, 인도를 무대로 사라진 친구를 찾아나선 『인도 야상곡』(1987년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 1989년 알랭 코르노가 영화화)에서는 페소아의 다른 이름(異名)인‘안토니우 모라’를 등장시켜 불면하는 밤의 마법적 의식세계를 배가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출간 예정)라는 페소아에 관한 연구서를 직접 쓰기도 했다. 타부키는 작가 페소아의 삶의 궤적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텃밭을 가꾼 것을 일생 동안 글에서건 삶에서건 부인하지 않았다. 이 책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은 그에 대한 가장 문학적인 반증이다.
전기적 사실들을 배경으로 페소아의 마지막 임종을 실감나게 그린 픽션
1994년에 나온 이 책은 타부키가, 1935년 페소아가 죽기 전 사흘을 상상하며 환상적으로 풀어낸 전기적 픽션이다. 다시 말해 페소아를 위한 문학적 초혼제이자, 타부키식의 오마주인 셈이다.
1935년 11월 28~30일, 이 짧은 3일의 기록 속에는 페소아의 전 생애와 문학세계의 정수를 아우르는 전기적 사실들이 간결한 대화 몇 마디 속에 모두 녹아들어가 있다. 십오 년간 페소아의 수염과 두발을 다듬었던 이발사 마나세스 씨, 그가 일했던 수출입 회사의 사장이자 힘든 순간마다 페소아 곁을 지키던 친구이기도 했던 카를루스 에우제니우 모이티뉴 드 알메이다, 페소아의 흩어진 트렁크 속 원고를 정리해 1982년 포르투갈어판 『불안의 책』 첫 편집본을 펴낸 자신투 드 알메이다 두 프라두 코엘류, 페소아의 삶에서 평생 단 한 번의 연인으로 남은 오펠리아 케이로즈 등의 실존인물들이 이 사흘 속에 등장한다. 또한 페소아의 다른 이름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세 인물―알베르투 카에이루, 히카르두 헤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을 비롯해, 『불안의 책』의 작가로 등장하는 베르나르두 소아르스, 그의 신이교주의 사상을 반영해낸 철학적 인물인 안토니우 모라 등이 죽어가는 페소아의 침상에 방문한다. 타부키는 이 책을 통해 페소아와 페소아들을 한자리에 불러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한다. 부제 ‘어느 정신착란’에서 보듯,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이 인물들은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하며, 아무개,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다. 페소아가 구현해내려 한 이 문학관이자 세계관이 담긴, 타부키만이 써낼 수 있는 결정적인 창작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타부키의 첫 눈길과 마지막 눈길의 만남: 「담배 가게」와 함께 보는 이 소설
페르난두 페소아는 70여 개가 넘는 다른 이름을 만들어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한 전기와 직업과 정신세계를 부여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를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삶으로 바꿔놓았던 문학적 현현이다. 타부키는 전무후무한 이 문학사적 인물의 가장 창조적인 초상화를 이 책을 통해 스케치해놓았다. 아마도 자신이 애정을 품었던 페소아의 마지막을, 이 가시세계에서의 임종을 어떻게든 글로써 지켜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인도 야상곡』에 나오듯, 심한 근시였던 페소아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 안경을 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쩌면 이 책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은 멀리 있는 것이 잘 안 보였던 그에게, 그 먼 곳에서도 지금 여기가 잘 보이도록 페소아의 마지막 눈에 건넨 타부키의 ‘문학(영혼)’ 안경인지 모른다.
한국어판 부록으로 실은 「담배 가게Tabacaria」 시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1928년 1월 15일, 알바루 드 캄푸스’의 이름으로 쓴 시다. 타부키가 “20세기의 가장 멋진 시”라고 상찬한 이 시에서, 누군가는 페소아의 세계에 반한 타부키의 ‘첫 눈길’에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에서 그려낸 그의 ‘마지막 눈길’을 겹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 맛보기】
이제 떠날 시간이에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이미지들의 극장을 떠날 시간입니다. 내가 영혼의 안경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당신이 알까요…… 나는 남자이자 여자, 노인, 소녀였고, 서양 세계 수도들의 커다란 대로에 모인 군중이었고, 우리가 평온함과 지혜를 부러워하는 동양 세계의 온화한 부처였고,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들, 내가 될 수 있었던 모든 타자였고…… 타오르는 여성이었고, 길에서 노니는 고양이였고, 태양이자 달이었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삶이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제 피곤해요. 내 촛불은 소진되었어요. 부탁해요, 내 안경을 주세요.(59쪽)
―페소아의 말
우리는 모두 이곳 대지로 돌아올 것입니다. 오, 위대한 페소아여, 자연이 원하는 무수한 형태로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조라고 부르는 개, 풀잎 한 줄기, 또는 리스본의 광장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느 젊은 영국 여인의 복사뼈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탁하건대, 지금 떠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로서 우리 사이에 잠시 더 머물러주십시오.(58쪽)
―페소아들 중 하나인 ‘안토니우 모라’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