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제4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이신조 장편소설 「기대어 앉은 오후」가 출간되었다.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은 1, 2회 수상자로, 현재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면서 90년대 한국 문단의 최전방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영하와 조경란(1회 공동수상), 전혜성(2회)을 배출함으로써, 4회째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명실공히 패기 넘치고 역량 있는 신인작가를 발굴해내는 국내 최고의 신인작가 산실로 인정받아왔다.
지난해에 비해 현격하게 늘어난 응모작 수(115편) 또한 미래의 한국문학을 이끌어갈 역량 있고 참신한 대형 신인 탄생에 대한 기대를 고무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난해 제3회 수상자를 내지 못한 만큼 심사위원들의 초조감도 적지 않았다. 기대와 관심, 걱정이 엇갈린 가운데 7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고, 도정일(문학평론가, 경희대 영문과 교수), 최인호(소설가), 임철우(소설가, 한신대 문창과 교수) 세 분 심사위원들이 본심에 들어갔다. 치열한 격론 끝에 이신조씨의 「기대어 앉은 오후」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이신조씨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8년에 『현대문학』 신인공모에 단편 「오징어」로 등단했으며, 제4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주목받는 신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권말에 실린 수상작가 인터뷰 참조)
가볍지 않은 생의 무게를 겸허하게 감싸안고자 하는 신인작가의 특별한 도전
「기대어 앉은 오후」는 심사위원들로부터 대중소비사회의 상징인 백화점 공간 속에서 우연하게 만나는 두 고독한 여인의 상처와 상실을 통해 소외된 존재들간의 소통 가능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신인다운 문제의식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이 새로운 방식의 질문이 섬세한 내면 묘사와 감각적인 문체, 그리고 영상적인 표현력과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다의적 진실을 꿰뚫어보는 섬세한 감성, 연민과 관용, 정밀한 심리 묘사 등과 같은 여성적 미학으로 현대 사회에서 훼손된 영혼들 사이의 교신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90년대 여성주의 문학의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적이고 독백적이며, 특히 소통 가능성에 관한 한 부정적인 기존의 여성소설들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의식이 심사위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삶의 공백을 메우는 ‘상처와 상실의 만남’
「기대어 앉은 오후」는 과잉과 결핍의 무한 반복으로 사막화하고 있는 거대도시의 그늘을 진지하게 주목한다. 소설에서 지구 온난화로 은유되는 도시의 사막화는 상처받은 두 여성의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사막화를 대표하는 장소가 바로 백화점이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치 않은 출생 비밀을 갖고 있는, 호출기 회사의 메신저로 일하면서 아르바이트로 포르노 영화 더빙 일을 하며 살아가는 20대 직장여성 은해와, 비행기 사고로 딸을 잃은 후 생의 무게중심을 잃고 부유하고 있는 50대 중년여인 윤자의 이야기가 각각 평행구조로 전개된다.
은해의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는 더러움에 대한 자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차고 깨끗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에 집착하는 근본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딸을 잃은 윤자는 높이뛰기에 집착하면서 은해에게서 죽은 딸의 분위기를 읽어낸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서로 알고 지내지 못하던 두 여자는 백화점 수영강좌에서 만나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두 여자의 만남은 차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물 안에서, 그러나 붉은 피 속에서 이루어진다. 차고 따뜻한 물과 피의 대비가 이 소설의 절정이다. 이 신인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심사위원 도정일 교수에 의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상처를 처리하며 닫힌 마음들은 어떻게 다시 열리는가”이다. 처음에는 완전한 타인이었지만 점차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면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두 여자의 모습은, “약간의 추력(推力)이 서로를 밀어내”지만 곧 “어김없이 마주 붙는” 두 개의 자석을 연상케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암시적인 에피소드, 섬세한 문체가 돋보이는 수작
두 여자가 만난 수영 강좌 첫날, 새우등뜨기에 실패한 윤자에게 은해가 “숨을 내쉬지 마세요. 그냥 죽은 것처럼, 숨을 딱 멈추고 있음 돼요”라고 말하며 도와주는 대목이나, 은해가 사랑하지도 않는 수영강사와 정사를 나눌 때 TV에서 자기가 더빙한 포르노 영화가 나오는 장면, 은해가 아버지의 낡은 장갑으로 자신의 처녀성을 훼손하는 장면, 윤자가 은해와 같이 산 장식용 자석 두 개를 은해에게 건네주는 대목들 또한 이 작품을 더욱 인상적으로 읽게 해주는 암시적 에피소드들이다.
‘은혜’가 아니라 ‘은해’라고,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준 최 대리에게 사랑을 느끼는 은해에게 있어 사랑이란, 그녀가 “나 특별해지고 싶어요”라고 독백하듯, “특별”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최 대리와의 만남은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특별”해지고자 하는 은해의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다. 사랑하지도 않는 수영강사와 데이트를 하고 식물인간과도 같은 정사를 나누지만 그 또한 허망할 뿐이다. 작가 이신조씨가 “특별할 것 없는 젊은 여성의 평범한 삶. 그 삶을 구성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질서를 그려보고자 했다”고 말했듯이, 은해는 뻔한 일상 속에서 뭔가 다른 삶을 꿈꾸는, “조금씩 모두 다르지만 결국은 모든 같”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폐경기를 앞둔 중년여인 윤자는 은해 또래의 딸을 잃고 상실감에 빠져, 이상식욕으로 음식을 마구 먹어대기도 하고, 백화점에서 하찮은 물건들을 훔치기도 한다. 그녀는 일상생활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높이뛰기의 비월을 상상한다. 언뜻 보기에, 공통분모가 거의 없어 보이는, 세대가 다른 두 여자가 만나 서로의 상처와 상실감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대목에서 두 여자는, 타인에서 ‘모녀’와 같은 친밀화를 이룩한다. 여기에서 작가가 갖고 있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건강한 긍정이 담겨 있다.
소설 끝부분에서 은해가 병원에서 유산에 대한 응급조치를 받은 후 윤자와 함께 어두운 공원을 오래도록 걸으면서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장면은, “정확한 것보다 정확하지 않은 것이 훨씬 결정적”인 모호하고 복잡한 현대의 일상 속에서 전혀 다른 두 여자가 만나 진실한 소통을 이루게 되는, 90년대 한국문학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심사평 중에서
* 이 소설은 ‘상처와 상실의 만남’이 어떻게 삶의 공백을 메우는 보완의 예술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무슨 깜짝 놀랄 만한 진기한 사건 소재, 엉뚱한 형식 실험, 과도한 진술 같은 것들의 선택이 줄 수 있는 과부하를 피하고 일상의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감동적 친밀화를 담담하게, 비명도 아우성도 없이, 고도의 절제된 서술 스타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도정일(문학평론가, 경희대 영문과 교수)
* 「기대어 앉은 오후」는 영상적인 표현력, 감각적인 문체, 여성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신세대 소설이다. 각각 세대가 다른 여성을 대비시키면서, 때로는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부딪치면서 도시적인 백화점 공간 속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두 여인의 심리 상태를 작가 특유의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최인호(소설가)
* 황폐한 우리들 생의 골목과 골목, 거기 어디서나 마주치게 되는 무수한 ‘관계의 우연성’ 속에서, 상처받은 익명의 존재들간의 소통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작가의 조심스런 질문은 무척 인상적이다. ―임철우(소설가, 한신대 문창과 교수)
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
* 은해를 통해서 요즘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젊은 여성을 그려보고 싶었다. 비단 소설뿐만 아니라 최근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고 하면,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업을 가졌으며, 성취 욕구나 자기 주장이 강한 식으로 인물이 설정된다. 그러나 내 또래의 여자들 중에도 소위 ‘현대 여성’의 이미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여자들이 의외로 많다. 남 앞에 나서거나 튀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들, 집에 돌아와 책을 읽기보다는 토크쇼를 보고 잠이 드는 여자들, 직장에 다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게 지상목표인 여자들, 그저 낭만적인 가정의 행복을 막연히 꿈꾸는 여자들 말이다.
* 나는 감히 살아가는 것을 생각할 때, 파이나 페스츄리 빵의 얇은 ‘켜’들을 떠올린다. 두께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얇고, 쉽게 바스라져버릴 것 같은 하나하나의 사소함이 수없이 쌓여,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무게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 복잡함과 미묘함.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고민한 문제는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 습작기를 거치면서 이미 ‘섬세한’ ‘여성적’이란 수식어를 많이 들어왔다. 한때는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가진 섬세함이나 여성적인 특징이 소설에 약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삶의 복잡 미묘함이다.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명료하고 뚜렷한 것을 좇는 나의 선천적인 기질을 경계하게 되고부터이다. 아직은 섬세함이나 여성적인 특징으로 전통적인 여성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