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마음자리를 따라 자전(自轉)하는 별인지도 모르겠어요.
여행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의 마을로 간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보낸 편지는 우리를 아늑한 말들의 풍경속으로 이끈다. 그곳엔 새로운 삶과 풍물이 있다. 다양한 삶의 풍경, 서로 다른 생각들, 기쁨과 상처, 그리고 길이 있다. 그 길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마음의 길이다.
중견소설가 4인의 지중해 기행!
중견 소설가 이제하 송영 서영은 김채원 4인의 공동 기행 산문집 『사막… 그리고 지중해에 바친다』는 이국의 여행지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물론 자기성찰이 있는 따뜻한 말들의 풍경이다. 방콕에서, 암만, 이라크, 이스탄불, 아테네, 로마, 마드리드, 그라나다, 파리까지 지중해 연안 도시 구석구석에서 묻혀온 여행지의 삶과 풍물과 그리움의 언어들이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지난 4월, 문단의 시선은 한 특이한 프로그램에 솔렸다. 그것은 여행을 통해서 여행에 관한 중편소설 1편씩을 문예지에 발표한다는 계획과 여행지에서 보내는 편지, 그리고 문화 기행기를 모아 각각 한권의 책으로 출간한다는 것이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국의 낯선 세계를 또다른 문학세계 모색이라는 화두를 궁글리며 한 달 일정으로 돌았다. 그런 가운데 틈틈이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냈다. 돌아와서는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 산문집을 묶었다.
여행지의 삶과 풍물과 그리움의 언어들!
"이 지구 위에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있어. 그 중에서는 모습도 아름답고 영혼이 순결한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과 새롭게 만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얼마나 기쁜 일이겠어? 그것은 여행의 꽃이라고 할 수 있지. 이 말을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거야. 삶이란 것도 하나의 긴 여행이니까."
이 말은 이들 여행의 의미를 잘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자 낯선 삶, 그리고 새로운 나와의 만남이다. 그들의 여행지는 동일하지만 시각의 편차는 다채롭다. 그 다채로움은 그들의 작품세계만큼이나 다양한 빛깔과 질감을 지닌 것이어서, 이 산문집은 정갈한 언어의 화원을 이룬다.
이제하, 송영 두 남성 작가들의 편지는 우선 불양(?)하다. 그들의 여행의 꽃은 이국의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들을 향한 감정은 속절없는 연애감정, 그것이다.
이제하가 반한 이웃집 여인은 영화 「이웃집 여인」의 여주인공과 닮은, 로마의 영어교사이다. 그는 이 여인에게 한 남성으로서 연애감정을 느낀다. 여행기간 동안 그냥 스쳐보낸 무의미한 풍경들이 그녀의 얼굴로하여 비로소 의미를 지니면서 강렬하게 다가온다. "대책이 안 서는 그 넓은 땅, 풀도 없이 그냥 햇빛 속에 내던져진 토괴(土塊)와 그 벌거벗은 지평선 앞에서는 나라도 부모도 생각나지 않고, 자식도 친구도 여자도 속수무책이었소" 근를 향한 감정은 심각하면서도 애매하기 짝이 없고, 격렬하면서도 몽롱하기 짝이 없는 묘한 것이다. 그렇게 편지는 -소라는 투박한 종결어미로 6통을 낳는다.
티그리스 강물을 바라보며 아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있는 송영 역시 주(主) 수신인은 첫눈에 반한 로라라는 미모의 이라크 여대생이다. 그녀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가 좋아하는 아랍의여가수 마즈다 루미 ? 눈빛을 지닌 여성이다. 작가는 그녀를 향해 종이학을 접듯 여행지의 감상을 접어 보낸다. 그 종이학 속에는 약 속의 아름다움, 이라크 사람들의 역사의식, 생활의 멋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인, 민중시인 로르카의 기념관 관람소감, 베르사유 단상 등이 빼곡히 들어 있다.
이 작가들의 남성으로서 느끼는 불량한(?) 연애감정은 오히려 솔직함으로 인하여 아름답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소설가 ○○○가 아닌 남성 ○○○로 돌아온다. 특별한 존재로만 여겼던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때 느끼는 은밀한 쾌감을 이들 편지는 안겨준다.
섬세한 마음의 깊이가 돋보이기로는 단연 서영은, 김채원 두 여류작가들의 글이다. 여성적인 섬세함으로 충만한 이들의 글은 남성작가들의 ?은 톤이 빠뜨린 잔잔함을 채우고 살리면서 산문집의 질감을 한결 부드럽고 윤기있게 한다.
부군(夫君) 김동리 선생에게 총 18편의 글을 바치고 있는 서영은의 편지는, 사막에서 나이든 침묵을 베개삼아 누워 밤하늘의 별들의 소리를 들으며 김동리 선생을 향한 사랑을 반추한다. 그가 일일이 토로하는 여행 근황과 이국의 풍물소개 역시 사랑의 다른 표현임은 물론이다. 여성 특유의 감각이 명주실처럼 곱다.
그에 반해 김채원의 글은 단정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감정은 잘 조율된 피아노 소리 같다. 로르카의 "집은 마음으로 지어진 내면의 냄새가 가득한 그런 구조"였음을 감지한다든지 아파트의 맨 꼭대기층에 밤늦도록 홀로 켜진 불빛을 보며 가슴 뭉클한 감동과 향수에 몸서리치거나, 불현 듯 찾아드는 삶의 근원적인 막막함에 시달리면서도 휘어지지않는 감정의 균형을 보여준다. 화가 김창렬, 소설가 박완서 김지원, 백도기 목사, 스페인 시인 로르카, 그리고 익명의 아주 작은 난쟁이, 피아노 치는 이, 어린 벗, 젊은 벗 등이 마음의 동반자들이다.
편지로 털어낸, 중년이라는 삶의 무게와 사유의 깊이!
여기서 지중해는 지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체험적인 시간만도 아니다. 지리적 공간과 체험적 시간, 그 사이에 말들의 지중해는 섬처럼 떠 있다. 그들의 애정에 의해, 그들의 글에 의해, 인간의 삶속으로 편입되고 인간을 향해 제 모습을 드러낸 지중해 풍경은 개성적이면서도, 하나의 큰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중년이라는 삶의 무게와 사유의 깊이, 절제된 감정, 유려한 문장 등으로하여 또하나의 행복의 충격을 전한다.
여기 묶여진 기행편지는 여행지에 대한 단순한 소개의 차원이 아니다. 그곳의 풍물과 감상이 버무려진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자 말들의 풍경이다. 투우, 피아노 소리, 로르카의 기념관에서 주운 두 개의 오렌지, 에게해에 발 담그던 장엄한 저녁노을, 몽마르뜨 공원의 화가 등 진솔한 문장과 풍물사진, 여행지 소묘로 이뤄진 이 삶의 언어들이 교양이나 견문의 확장을 바라는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재미는 적다. 그러나 문인들의 눈에 비친 지중해의 풍경이라는 호기심 외에도 여행과 관련된 작가들의 마음의 지형도를 궁금하게 여기는 독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