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사냥" "모래내 모래톱"으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는 작가 이병천씨는 1981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가,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줄곧 무게 있는 주제의식과 감칠맛 있는 문체를 조형해왔다.
동학농민전쟁을 배경으로, 총이라는 신식무기의 급속한 등장 속에 조선검의 자존을 지켜가는 한 검객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조선검과 검술의 운명 및 동학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한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刊) 제1부 1, 2권이 출간되었다.
그의 소설은 사회적 진실의 포착에 민감하면서도 개인의 미세한 진실이 들어설 자리를 풍부하게 남겨놓은 미덕을 발휘함으로써 독자들의 든든한 신뢰를 얻어왔다. 그의 첫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에서도 작가의 그런 고유한 미덕은 우리 근대사의 격변기를 배경 삼은 역사적 상상력과 어우러지면서 장쾌하고 매력적인 소설 공간을 빚어내고 있다.
지고한 조건검의 자존을 지켜가는 한 검객의 불? 같은 일대기
전 9권으로 계획된 이 소설은 점차 맥이 끊겨가고 있던 조선검의 운명과 보잘것없는 민초들이 시대의 폭력을 안고 뒹굴며 피흘리는 모습과 그 피흘림이 인간의 운명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사회 역사적 공간 속에 개인사와 민족사가 어떻게 서로 얽히고 일그러지며 몸부림치는가를, 그리고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완성해가는가를 긴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는 대하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은명기는 구식군 출신이자 조선의 전통검법을 전수받은 마지막 검객으로, 지고한 조선검의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의협의 인물이다. 임오군란을 겪기도 한 그의 개인사는 동학농민전쟁이라는 한국근대사의 비틀거림에 실려,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조선검법의 소명을 걸머진 채 일그러진 한국근대사의 원형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번에 출간된 제1부 황혼(1, 2권) 편은 한 시대의 암울한 풍경 위에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를 구출하려는 주인공 일행의 고초와 의리, 그리고 점차 민족과 외세에 눈뜨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동학농민전쟁의 불길이 사위어가던 1894년 섣달 초하루, 검4객 은명기는 관군에게 생포된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구출하라는 절대절명의 임무를 받는다. 그는 보부상 출신인 박시철과 백정 출신인 최대웅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며, 험난한 역사의 격랑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편 메이지 유신 이후 무장해제를 당한 일본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거친 기운의 배출구를 찾아 조선을 넘보게 되고, 일부는 조선의 고수들과 진검 승부를 벌인다는 명목으로 삼남으로 진출한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도 뭇시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이타 무사시도 그렇게 잠입, 피폐한 이땅의 곳곳을 유랑하며 서서히 숙명적인 대결을 향해 검을 벼린다.
동학농민전쟁을 검객의 시각으로 접근한 독특한 소설
이 소설은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동학농민군과 이를 탄압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대결을 기본구도로, 억압받는 민초들이 자신들의 염원을 활짝 꽃피워 보려는 뜨거운 몸짓을 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향한 그 몸짓의 하나가 농민군의 지도자 구출이다. 농민군 지도자들은 자연인으로서의 한 개인이라기?는 희망의 나라를 향한 민초들의 등불이자, 염원으로 구현된 거대한 상징체였다. 이러한 그들이 생포됨은 곧 염원의 동결을 뜻하는 것이었고 희망의 소멸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한 민초들의 형실적 패배에도 굴하지 않는, 끈질긴 저항은 자신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몸짓에 다름아니다.
이와같이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는 역사의 표면으로 돌출한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전쟁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 전란을 통과하면서 망가져버린 민초들의 삶을 중심으로 그들의 훼손된 삶 속에서도 피어나는 의리, 사랑 같은 따스함을 소설의 표면으로 밀어올려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은 여타의 동학 관련 소설들과는 달리 동학농민전쟁을 평면적으로 추적하기보다는 조선의 마지막 검객이라는 특이한 소재에 초점을 맞춰 동학농민 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묻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 속의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을 근간으로 철저한 자료조사와 풍부한 방언 구사, 칼춤과 칼노래의 복원 등 역사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작가의 투철한 장인정신의 결실이기도 하다.
또한 이 소설은 탄탄한 구성과 시적인 함축미, 긴장감 있는 문장으로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한편 걸쭉한 입담으로 당시의 삶의 내용과 빛깔들을 날것그대로 복원해놓고 있다. 이는 당시의 풍속과 동학에 대한 민초들의 관점을 삼남지방 특유의 방언에 의탁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질감을 한층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는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도 건강한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민초들의 삶과 한 검객의 초상을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장려한 서사적 화폭으로 조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왜 우리의 전통검법이 사라져야 했으며,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조선의 동학농민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활용했는가?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녹두장군 전봉준이 곧잘 춤추며 불렀다는 칼춤과 칼노래의 실체와 운명 등등의 과제를 추적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또다른 시각의 제공과 더 넓은 사유의 장을 펼쳐 준다.
문학평론가 남진우씨의 언급처럼 우리는 이제 이 소설을 얻음으로써 우리도 "일본의 "미야모도 무사시"에 필적할 수준높은 무협역사소설"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